노자지귀 1권 권일:상덕부덕편(卷一)

📚 노자지귀(老子指归) · 제1편

권일:상덕부덕편(卷一)


「가장 높은 덕을 지닌 이(上德)는 인위적인 덕을 행하려 애쓰지 않으므로 참된 덕을 지니고 있으며, 낮은 덕을 지닌 이(下德)는 덕을 잃지 않으려 늘 의식적으로 얽매여 있으므로 참된 덕을 지니지 못합니다.

가장 높은 덕을 지닌 이는 억지로 도모함이 없이 행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바가 없고(상덕무위이무불위), 낮은 덕을 지닌 이는 억지로 목적을 품고 행하므로 늘 의식적인 한계를 지닙니다.

가장 높은 어짊(上仁)을 지닌 이는 사랑을 행하되 사사로운 목적을 품지 않으며, 가장 높은 의로움(上義)을 지닌 이는 의리를 행하되 의식적인 명분과 의도를 품습니다.

가장 높은 예법(上禮)을 지닌 이는 예절을 다해 행동하나 세상의 응답이 없으면, 마침내 팔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끄집어당겨 강요하려 듭니다.

그러므로 대자연의 도(道)를 잃어버린 후에 덕(德)이 강조되고, 덕을 상실한 후에 어짊(仁)이 강조되며, 어짊을 잃어버린 후에 의로움(義)이 대두되고, 의로움을 상실한 후에 예법(禮)이 강조됩니다. 무릇 예법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 충성과 신의가 지극히 엷어진 껍데기일 뿐이며, 세상 온갖 혼란과 무질서의 우두머리(亂之首)가 됩니다.

남보다 앞서 세상만사를 다 안다고 자부하는 자(前識)들은 도의 꽃다운 허울이자 겉치레에 불과하며, 인간이 어리석어지는 어리석음의 시초가 됩니다.

이 때문에 참된 대장부는 그 두텁고 본질적인 실질(厚)에 머무르고 그 얕고 가벼운 형식(薄)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 알차고 알맹이 있는 실리(實)에 거하고 그 화려하고 헛된 겉치레(華)에 머무르지 않으니, 저 가벼운 허식을 과감히 버리고 이 참된 본질을 취해야 합니다. (去彼取此)」


📖 엄군평(嚴君平) 《노자지귀(老子指歸)》 해설 및 주석

천지가 생겨나 움직이는 운행의 유래와 만물이 제 생명을 보존하여 살아가는 근본 까닭을 살펴보면, 도(道)는 모든 존재의 으뜸이자 기틀(元)이 되고, 덕(德)은 만물이 태어나는 시작(始)이 되며, 신명(神明)은 만물이 으뜸으로 삼는 정수(宗)요, 태화(太和)는 만물의 가장 깊은 조상(祖)이 됩니다.

다만, 대자연의 도(道)에는 무한한 깊이와 subtle한 미묘함이 있고, 덕(德)의 깊이에는 두터움과 얇음이 있으며, 신(神)의 기운에는 맑음과 탁함이 있고, 조화로움(和)에는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이 중 지극히 맑은 기운은 위로 올라가 하늘(天)이 되고, 탁한 기운은 아래로 내려와 땅(地)이 되며, 양(陽)의 기운은 남자가 되고 음(陰)의 기운은 여자가 됩니다.

사람과 온갖 사물들이 이 천지자연의 기운을 이어받을 때(禀假), 그 이어받는 분량에 많고 적음이 있으며 성정의 정밀함과 거침에 차이가 생깁니다. 그로 인해 수명의 장단이 나뉘고, 마음의 Disposition에 아름다움과 추함이 생기며, 그 품은 뜻에 크고 작음이 나뉩니다. 어떤 이는 소인배가 되고 어떤 이는 군자가 되니, 온갖 변화와 흩어짐을 겪으며 인간의 부류는 수많은 차등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도를 체득한 도인(道人), 덕을 체득한 덕인(德人), 인을 행하는 인인(仁人), 의를 행하는 의인(義人), 예를 지키는 예인(禮人)의 다섯 가지 성정이 존재하게 됩니다.

장자(莊子)는 이에 대해 묻는 이에게 답하기를, ‘지극히 텅 비고 억지로 행하는 무위(無爲)의 상태에서 온 세상 만물을 일깨우고 인도하는 자를 도인(道人)이라 한다. 항상 맑고 고요하게 대자연의 질서에 따르며 무위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내는 자를 덕인(德人)이라 한다. 만물을 고르게 사랑하고 널리 베풀어 끝이 없는 자를 인인(仁人)이라 한다. 이름과 실재를 바르게 평정하고 온갖 세상사를 마땅함에 따라 처신하는 자를 의인(義人)이라 한다. 스스로 겸손하게 양보하고 공경함으로써 대자연의 조화를 굳게 지키는 자를 예인(禮人)이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무릇 이 다섯 부류의 인재들은 저마다 무병장수를 누리기를 즐겨하고, 두터운 덕(德)을 존숭하며, 고결한 이름을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고유한 성정과 기질을 지키며, 자신이 가진 지혜와聪明에 의지하고, 각자의 장기를 따르며 자신이 편안함을 느끼는 귀처로 달려가다 보니, 저마다 추구하는 바가 엇갈리고 나뉩니다.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수천 가지 서로 다른 명호와 등급이 갈라져 나오는 까닭입니다.

군주가 다스리는 덕(德)의 수준에도 높고 낮음의 우열이 있고, 세상의 풍속과 세대에도 융성함과 쇠퇴함의 흐름이 엄연히 존재하며, 풍속과 문화의 갈래가 다르고 백성들의 수명과 운명도 고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태고의 위대한 군주는 천지가 뒤섞여 형체가 없고 지극히 아득하여 이름을 남기지 않았으나 그 교화가 천하에 가득했고(溟涬玄寥), 어떤 군주는 아득히 펼쳐진 혼돈의 기틀 속에서 황(皇)이라 일컬어졌으며, 어떤 군주는 거대하고 온화한 흐름 속에서 제(帝)라 불렸으며, 밝게 만방을 비추며 세상에 우뚝 선 자는 왕(王)이라 불렸고, 저마다 다른 reach와 영향력으로 제후들을 통솔한 자는 패(伯)라 일컬어졌습니다.

그러나 진정 깊이 따져보자면, ‘패’라고 불리는 이가 참된 패가 아니며, ‘왕’이라 불리는 이가 참된 왕이 아니며, ‘제’가 참된 제가 아니고, ‘황’이 참된 황이 아닙니다.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또한 참된 유(有)가 아니며, 텅 빈 무(無) 또한 참된 완전한 무가 아니니, 천만 가지로 무상히 변화하는 천지간의 조화를 어찌 인간의 좁은 언어적 이름으로 온전히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성을 갈아치우며 왕이 되어 태산(泰山)에 봉하고 양보산(梁父山)에서 선양을 올린 제왕이 일흔두 명이나 되는데, 그들의 도리에 실체가 있어 징후를 알아볼 수 있는 자도 있었으나 아득하고 미묘하여 이름을 부를 수조차 없는 자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성정과 수명이 같지 않았고, 그들이 세상에 쌓은 공로와 이름 또한 고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가장 높은 덕을 지닌 상덕의 군주(上德之君)는 오직 대자연의 도(道)를 체득하여 그 안에 온전히 머무릅니다. 그의 정신은 대자연의 변화와 나란히 동행하며, 그의 은밀한 덕의 움직임은 아득하고 깊은 무의 경지(玄冥)에서 소리 없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천하 백성들이 그를 임금으로 떠받들면서도 정작 그에 대해 보거나 들은 바가 전혀 없습니다. 군주의 큰 덕이 만물에게 물 흐르듯 가닿아 만물이 다스려지되, 만물은 저마다 ‘우리가 원래부터 스스로 그러한 자연일 뿐이다(皆曰自然)’라고 편안히 살아갈 뿐입니다.

반면에 낮은 덕을 지닌 하덕의 군주(下德之君)는 덕(德)의 법칙을 마음에 품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행하려 애씁니다. 그의 정신은 대자연의 변화와 더불어 노닐며, 그의 덕의 수준은 저 높은 누런 하늘(皇天)에 버금갈 정도로 훌륭합니다. 천하 백성들이 그를 임금으로 우러러보며 혹 보거나 소문으로 듣기도 하니, 그의 은택이 만물에게 널리 가닿아 혜택을 주지만, 만물은 그 은혜가 흘러나온 시원인 군주를 기억하고 우러르게 됩니다. 억지로 덕을 실천하려 의식적으로 공적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 주요 한자 · 고사성어 풀이

  • 上德不德 (상덕부덕) — 가장 높은 덕을 지닌 이는 스스로 덕을 행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므로 오히려 참된 덕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억지로 덕을 베풀려고 애쓰는 하덕(下德)의 위선과 대조되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 體道而存 (체도이존) — 대자연의 근본 도리(道)를 온몸으로 체득하여 그 안에 자연스럽게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상덕(上德)의 군주가 인위적인 통치나 간섭을 배제하고,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여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최고의 치세 경지를 일컫습니다.
  • 無爲自然 (무위자연) — 인위적인 억지 행동이나 가식을 부리지 않고, 대자연의 순리와 흐름에 부합하여 스스로 그러하게 다스려지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 前識 (전식) — 세상만사를 미리 다 안다고 자부하며 잔꾀와 얕은 지식을 뽐내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노자 철학에서는 이러한 인위적인 총명함이 도(道)의 참된 두터움을 잃어버리는 겉치레이자 인간이 어리석어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라고 경고합니다.
  • 老子指歸 (노자지귀) — 한나라 시대의 은사이자 명망 높은 사상가인 엄군평(嚴君平)이 저술한 《노자 도덕경》의 주석서입니다. 노자의 도덕사상과 도교적 우주론, 무위자연의 도리를 형이상학적이고 체계적인 인문학으로 승화시킨 불후의 도가 문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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