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장집(馬季長集) 5권 부록(附录)
본전(本传)
마융(马融)은 자가 계장(季长)이며 부풍군 무릉현 사람으로 장작대장 마엄(马严)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미사여구에 능하고 외모가 아름다웠으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처음에 경조윤 유지(挚恂)가 유학으로 교수를 하였으나 남산에 숨어 징빙(徵聘)에 응하지 않아 관서(关西)에서 명성이 높았는데, 융이 그를 따라 유학하며 경적(经籍)에 두루 정통하였다. 유지가 융의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영초 2년, 대장군 등즐(邓骘)이 마융의 명성을 듣고 사인(舍人)으로 불렀으나 자기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마침내 명에 응하지 않고 양주 무도(武都)와 한양(汉阳) 경계에 객으로 머물렀다. 마침 강족 노략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변방이 어지러워지고 쌀값이 뛰니 관중 이서 지역에 길가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잇닿았다.
융이 기아와 곤궁에 처하자 마침내 후회하며 탄식하고 그 친구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왼손으로 천하의 지도를 쥐고 오른손으로 그 목을 베는 짓은 어리석은 자라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굽은 풍속과 지척의 부끄러움 때문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몸을 멸망시키는 것은 아마도 노장(老庄)이 말한 바가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가서 등즐의 부름에 응하였다.
4년에 교서랑중(校书郎中)에 제수되어 동관에 나아가 비서를 교감하였다. 이때 등태후가 임조하고 등즐 형제가 정사를 보좌하였다. 그런데 속유(俗儒)와 세속의 선비들이 문덕은 일으킬 만하나 무공은 마땅히 폐해야 한다고 여겨 마침내 사냥하는 예를 멈추고 전쟁의 법을 쉬게 하였다. 이 때문에 교활한 적들이 종횡무진으로 날뛰며 방비가 없는 틈을 탔다. 융은 이에 격분하여 문무의 도는 성현이 추락시키지 않은 바요 오재(五才)의 쓰임은 어느 하나도 폐할 수 없다고 여겼다.
원초 2년, 《광성송(广成颂)》을 올려 비판하며 간언하였다. 송이 주청되자 등씨 일가의 뜻에 거슬려 동관에 머물며 10년 동안 조동되지 못했다. 형의 아들의 상(丧)을 핑계로 스스로 탄핵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태후가 이를 듣고 노하여 융이 조서의 제수를 부끄럽고 박하게 여겨 주군에서 벼슬하려 한다고 말하고는 마침내 금고(禁锢)형에 처하게 하였다. 태후가 붕어하고 안제(安帝)가 친정(亲政)하자 다시 낭서(郎署)로 불러 강부(讲部)에 복귀시켰다. 나가서 하간왕(河间王)의 구장사(厩长史)가 되었다. 이때 황제의 수레가 태산(岱宗)으로 동쪽 순행을 가니 융이 《동순송(东巡颂)》을 올렸고 황제가 그 문장을 기이하게 여겨 불러 낭중(郎中)에 배수하였다. 북향후(北乡侯)가 즉위하자 융은 병을 핑계로 떠나 군의 공조(功曹)가 되었다.
양가 2년, 돈박(敦朴)한 자를 천거하라는 조서가 내려지자 성문교위 잠기(岑起)가 융을 천거하였고 징소되어 공거(公车)에 나아가 대책을 올리고 의랑(议郎)에 배수되었다. 대장군 양상(梁梁)이 표를 올려 종사중랑으로 삼았고 무도 태수로 전임되었다. 이때 서쪽 강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정서장군 마현과 호강교위 호주가 이를 쳤으나 지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융은 그들이 장차 패할 것을 알고 상소를 올려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했으나 조정은 쓰지 못했다.
또 진술하기를 “별이 참(参)과 필(毕) 분야에 살별이 뻗치니, 참은 서방의 별자리요 필은 변방의 군사이며 분야에 이르러서는 병주(并州)가 이에 해당합니다. 서융과 북적이 장차 일어날 것이니 마땅히 두 방향을 방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농서의 강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오환이 상군을 침범하니 모두 마침내 융의 말과 같았다.
세 번 승진하여 환제(桓帝) 때 남군 태수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융이 일에 있어 대장군 양기(梁冀)의 뜻을 거슬린 적이 있었는데, 양기가 유사(유관 부서)에 풍자하여 융이 군에 있을 때 탐욕스럽고 탁했다고 상주하게 하여 관직을 면직시키고 머리를 깎아 삭방으로 유배 보냈다.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고 사면을 받아 돌아와 다시 의랑에 배수되어 동관에서 저술에 중점을 두다가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융은 재주가 높고 학식이 넓어 당대의 통유(通儒)가 되었고,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고 기르니 항상 천여 명이나 되었다. 탁군의 노식(卢植)과 북해의 정현(郑玄)이 모두 그의 문도이다. 거문고를 잘 타고 피리 불기를 좋아하였으며,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살고 유자(儒者)의 절개에 얽매이지 않았다. 거처하는 집과 그릇, 의복은 사치스러운 장식을 많이 두었다. 항상 높은 마루에 앉아 붉은 비단 휘장을 치고 앞에서는 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뒤에는 여자 악사들을 열지어 세워두었다. 제자들은 차례로 서로 전수하였을 뿐, 그의 방에 들어가는 자는 드물었다.
일찍이 《좌씨춘추》를 훈해하고자 하였으나 가규(贾逵)와 정휴(郑觿)의 주(注)를 보고는 이르기를, “가군(가규)은 정밀하나 넓지 못하고 정군(정휴)은 넓으나 정밀하지 못하다. 이미 정밀하고 넓게 되었으니 내가 무엇을 더하겠는가!” 하였다. 단지 《삼전이동설(三传异同说)》을 지었고, 《효경》, 《논어》, 《시경》, 《주역》, 《삼례(三礼)》, 《상서》, 《열녀전》, 《노자》, 《회남자》, 《이소》에 주를 달았으며 지은 부(赋), 송(颂), 비(碑), 뢰(诔), 서(书), 기(记), 표(表), 주(奏), 칠언(七言), 금가(琴歌), 대책(对策), 유령(遗令)이 무릇 21편이었다.
처음에 융이 등씨(邓氏)에게 징계당한 데 징벌받아 다시는 권세가에게 거슬리고 싶지 않아 마침내 양기(梁冀)를 위해 이고(李固)를 상주하는 글을 초안하였고 또 《대장군서제송(大将军西第颂)》을 지으니 이로 인해 매우 정직한 이들에게 부끄러움을 샀다. 나이 88세로 연희 9년에 집에서 졸(卒)하였다. 유령으로 박장(薄葬)을 명하였다. 족손(族孙) 마일제(日磾)는 헌제 때 벼슬이 태부(太傅)에 이르렀다.
논(论) – 평가
논(论)하여 말한다: 마융이 등씨의 명을 사양하고 롱(陇)과 한(汉)의 사이를 배회한 것은 장차 그 절개를 지키려는 뜻이 있었던 것인가? 이내 비루한 선비의 절개를 부끄럽게 여기고 헤아릴 수 없는 몸을 아껴, 마침내는 사치와 쾌락으로 본성을 제멋대로 하고 당부(당파에 붙음)하여 비난을 이뤘으니, 진실로 지식으로 능히 사욕을 바로잡는 자가 드물다 할 것이다.
대저 일에 고통이 따르면 온전히 하려는 정이 옅어지고, 삶이 두터우면 안존(安存)하려는 생각이 깊어지기 마련이다. 높은 곳에 올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형벌받은 죄수(胥靡)이고, 당마루에 앉지 않는 자는 천금의 자식(부잣집 아들)이다. 그 대략을 더듬어보건대 자신이 편안한 바를 귀결할 따름이다. 사물과 자아는 다르게 관찰되니 또한 번갈아 가며 서로 비웃을 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