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록산사적권하(卷下)
📚 안록산사적(安禄山事迹) · 제3편
안록산사적권하(卷下)
1. 안록산의 참칭과 참혹한 삼사언형(三司谳刑)
천보(天寶) 15재(756년) 정월 을묘일 초하루, 안록산은 낙양(동도)의 명망 높은 노인들과 승려, 도사(耆老缁黄)들을 동원하여 황제 자리에 오를 것을 청하는 권진(劝进)을 시키고, 마침내 거짓으로 제위에 올랐다. 국호는 대연(大燕)이라 하고, 스스로를 웅무황제(雄武皇帝)라 일컬었다. 안록산이 처음에 반역을 꾀할 무렵, 도성에는 이런 동요가 돌았다.
“제비(燕)가 날아 하늘로 올라가니, 하늘의 딸(女)이 흰 담요(氈)를 까네. 담요 위에는 엽전 한 꿰미(貫)가 놓였구나.”
여기서 제비(燕)는 안록산이 세운 나라의 국호다. 제비를 거듭 말한 것은 뒷날 사사명(史思明) 역시 천자를 자칭할 것임을 뜻한다. 하늘의 딸(天女)은 편안할 안(安) 자를 파자한 것이다. 흰 담요를 깐다는 것은 안록산이 낙양에 입성하던 날에 한 자가 넘는 폭설이 내린 것을 뜻한다. 담요 위에 엽전 한 꿰미가 놓인 것은 안록산이 제위에 머무는 날이 겨우 천 일(한 꿰미는 1000문)에 불과함을 예언한 것이다.
안록산은 제위에 오르며 “낙양에 들어서자마자 서설이 한 자나 내렸다”며 기뻐했다. 시인 노언(卢言, 혹은 안颜이라고도 함)이 안록산에게 시를 바쳐 아뢰기를,
“주역에 이르길 구름과 천둥이 모여 둔(屯)을 이루니, 대군께서 경륜을 다스리시도다. 말 위에서 천하를 쥐시고, 눈 속에서 해신(海神)에게 조회를 받으시네.”라 했다.
안록산은 연호를 성무(聖武) 원년으로 고치고, 승상 이하의 백관을 두었으며, 그의 아들 안경서(安庆绪)를 왕으로 봉하고, 당나라 투항 장수인 달해순(达奚珣)을 시중(侍中)으로, 장통유(张通儒)를 상서(尚書)로 삼았다.
처음에 분양군왕 곽자의(郭子儀)가 동도(낙양)를 수복한 뒤, 거짓 조정의 벼슬을 지냈던 진희열(陈希烈) 등 350여 명을 압송하여 경사(장안)로 보냈으며, 아울러 귀순하는 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관대하게 용서해 달라는 표문을 세 차례나 올렸다. 그러나 당 현종(상황)은 조정의 관원들이 피난길에 자신을 수행(扈从)하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깊어 칙령을 내렸다.
“처음에 도적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 갑작스레 위협을 당해 복종했다고는 하나, 역적의 벼슬을 수년 동안 지냈으니 어찌 도적과 뜻을 같이한 무리가 아니겠는가!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아가면서 그대들의 부끄러움이 될 것이니, 마땅히 삼사(三司)에 넘겨 엄히 다스려 처분하라.”
그 뒤 형부, 어사대, 대리시의 삼사에서 신문한 뒤 형벌을 심리하여 장계를 올렸다.
“달해순, 그의 아들 달해지, 설효(혹은 긍兢이라고도 함), 위항, 한징정, 대통단, 대화, 유자영 등은 대벽(사형)에 처해야 마땅합니다. 진희열, 장균, 문용지, 곽납, 허언호 등은 자결을 명하십시오. 허방, 우문반, 노자려, 달우, 소극제, 진□, 유방, 이언광, 하창의, 하처준, 최숙 등은 변경 변방 밖으로 유배 보내어 조정의 품계에서 지워 버리소서.”
당 숙종황제가 이르기를, “달해순과 달해지 부자가 함께 사형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차마 볼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달해지의 형벌을 한 단계 낮추어 옥에 가두게 했다.
당시 태사 방관(房管)이 아뢰기를, “장균은 역적들의 소굴로 가려 할 때, 당나라 조종의 황릉이 있는 오릉(五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차마 떠나지 못했습니다.”라 하니, 마침내 사형을 한 단계 감하여 애주(崖州)로 유배 보냈다. 또한, 조정에서는 당나라 공신 한공 장인미(혹은 장인단)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훼손했는데, 이는 그의 아들 장통유가 안록산의 재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역적에게 귀순했던 관원 중 장만경, 독고문속, 장휴 세 사람은 본래의 당나라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는데, 독고문속은 안록산이 당나라의 태묘(太廟)를 파괴하라고 명령했을 때 차일피일 미루며 끝내 사직을 온전히 보존했기 때문이며, 장만경은 황족들을 잡아 죽이라는 안록산의 명을 받고 교묘하게 피해 수많은 종실을 살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장휴 또한 안록산에게 여러 차례 반역을 멈추라고 간언했다. 이 두세 사람은 본래 안록산의 빈객과 보좌진이었으나 의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 밖의 모든 문무백관은 안록산이 멋대로 관직을 임명했다.
안록산은 범양(范陽)을 동도(대연의 동도)로 삼고, 범양의 백성들에게 평생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며, 그 성의 동쪽 모퉁이에 있는 사택을 가리켜 잠룡궁(潜龙宫)이라 불렀다. 그 저택은 본래 동라관(同罗馆)으로 지어진 것으로, 앞뒤로 10여 개의 안뜰이 있어 대문과 망루가 장대하고 안방이 깊고 그윽하여 흙나무의 기묘함과 옻칠 및 조각의 화려함이 가히 황궁에 버금갈 정도였다. 안록산이 생전에 은밀히 1천만 전을 주고 사들이겠다고 장계를 올려 당 현종의 허락을 받아 하사받았던 집인데, 이제 제위에 오르자 잠룡궁이라 칭한 것이다.
2. 가순의 충의로운 거사 좌절과 낙양 기예인들의 청수하 대참사
거짓 조정의 절도유후 가순(贾循)과 우우후 정초(程超)는 범양을 들어 당나라 조정에 다시 귀순(归顺)하고자 모의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안록산이 임명한 거짓 탁지부사 향윤객(向润客)에게 발각되었다. 향윤객은 비밀리에 안록산의 사면령을 담은 거짓 서신을 보내어 한조양(韩朝阳)으로 하여금 폭로하게 했다.
경인일에 한조양이 낙양으로부터 안록산의 조서를 가지고 당도하여 볼일을 마치고 별관으로 들어갔다. 가순은 한조양이 자신을 해치려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와 마주 앉아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때 한조양이 가순을 이끌어 밀어를 나누는 척하다가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뽑아 그의 목을 베어 죽였다. 이어 거짓 조서를 선포하여 가순의 반역 죄상을 낱낱이 꾸짖고, 정초마저 베어 그들의 머리를 동군(東郡)으로 보내 전람하게 했으며 그 처자식까지 몰살했다. 이어 평로지절 여지회(吕知诲, 혹은 절节)를 범양유후로 삼았으나, 여지회 역시 군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안록산은 공을 세운 향윤객에게 우산기상시(右散骑常侍)의 벼슬을 가봉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또한 범양부연인 황족 이계(李戒) 등 4명을 죽이고 그 처자를 몰수했다.
5월, 해(奚)와 거란(契丹)의 두 부족이 북쪽 산골짜기 관문을 뚫고 끊임없이 범양으로 쳐들어와 소, 말, 부녀자와 아이들을 약탈하고 성 아래에 며칠 동안 머물렀다. 성안에는 유후가 거느린 수천 명의 나약한 군사뿐이어서 도저히 대적할 수 없었다. 향윤객 등은 대책을 세우지 못하다가, 궁여지책으로 광대 무리 중 높은 장대 위에 매달려 줄을 타는 이들이 날쌔고 민첩하니 병사로 쓸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그들에게 무기를 주어 싸우게 했다.
그들은 성 북쪽의 청수하(清水河)에서 크게 패하여 해족과 갈족의 무리에게 몰살을 당했다. 오직 두세 명만이 풀숲에 엎드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광대들은 본래 당 현종이 안록산에게 하사했던 자들로, 세상에 둘도 없는 기예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기예를 가르치고 배워 무리가 500여 명에 달했다. 혹은 한 사람이 어깨 위에 다른 이를 태우고 머리 위에 기물(□)을 이었으며, 24명은 높이가 백여 자에 달하는 대나무 장대를 치켜들었다. 그 장대 끝에서 원숭이나 날아다니는 새처럼 몸을 솟구치며 텀블링을 하니 참으로 기묘하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며칠 동안 힘든 기색도 없이 펼쳐지는 기예에 구경하는 이들이 땀을 흘리고 눈이 아찔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전투로 인하여 이 기이한 기예인 무리는 모조리 몰살당하고 말았다.
오랑캐들이 들이닥치기 한 달여 전부터 백성들 사이에는 이런 동요가 감돌았다.
“전에는 장대 타는 기예를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더니, 오늘 보니 참으로 눈 뜨고 볼 수가 없구나. 단 오일만 기다려 보아라, 청수하 강가에서 그 기예의 최후를 보게 되리라.”
거란인들은 처음에 이 노래를 듣고 뜻을 깨닫지 못했으나, 청수하 전투에 이르러 비로소 그 예언이 들어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3. 동관(潼關)의 대참패와 가섭한(哥舒翰)의 비참한 투항
6월 8일 을유일, 명장 가섭한(哥舒翰)이 군사를 이끌고 동관을 나섰으나 안록산의 부하 장수 최건우(崔乾佑)에게 대패했다. 14일 신묘일에 철옹성 같던 동관이 끝내 함락되었다.
처음에 가섭한이 동관을 굳게 지키고 있을 때, 어떤 이가 건의하기를, “안록산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은 간신 양국충을 척살하겠다는 것입니다. 장군께서 만약 2만 명의 군사를 남겨 동관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대군을 모두 이끌고 장안으로 진격하여 양국충을 척살하신다면, 이는 한나라 때 조조(晁錯)를 죽여 오·초 7국의 난을 꺾은 기막힌 상책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라 하니, 가섭한이 이를 윤허했으나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누군가 이 음모를 양국충에게 밀고하자 양국충은 사색이 되어 크게 두려워하며 황제에게 장계를 올렸다.
“병법에 이르길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잊지 말라 했습니다. 지금 동관에 대군이 비록 많다고는 하나 배후를 지키는 후위 부대(后殿)가 없으니, 만에 하나 사태가 불리해지면 경사가 위험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궁궐의 말 방목장에서 기르는 마부 소년들 3,000명을 선발하여 황실 금원 안에서 훈련시키게 하소서.”
현종이 이를 수락하여 검남군의 장수 이복덕(李福德)과 유광정(刘光庭)을 보내 부대를 나누어 조련하게 했다. 양국충은 또 장계를 올려 의병 1만 명을 소집하여 패상(霸上)에 주둔시키고 그의 심복인 두간운(杜干运)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했다.
가섭한은 자신이 양국충에게 모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두간운의 부대를 동관의 지휘 아래로 귀속시켜 달라고 표문을 올렸다. 그리고 두간운을 동관으로 불러 군사적 책략을 상의하는 척하다가 그를 단칼에 베어 버렸다. 양국충은 제 아들 양훤(杨暄)에게 한탄하기를 “내 죽을 날이 머지않았구나”라고 했다. 가섭한 또한 이때부터 마음이 스스로 불안해졌다.
조정 대신들과 장수들은 동관이 300여 리에 걸쳐 험난한 요새를 이루고 있으니, 험한 곳을 굳게 지키는 것이 유리할 뿐 요새 밖으로 나가 선제공격을 하는 것은 지극히 불리하다고 간언했다. 그러나 양국충은 가섭한이 대군을 쥐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여 속전속속으로 싸우게 하려고 황제를 부추겨 연일 출전을 독촉했다. 도적의 장수 최건우가 관문 앞에 이르러 연일 출전을 요구하자, 양국충은 가섭한이 겁을 먹고 진격하지 않는다며 참소했다. 현종이 거듭 진격을 명령하자 가섭한은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말과 보병 15만 대군을 이끌고 최건우의 군사와 맞닥뜨렸다.
처음에 가섭한은 수레에 두터운 펠트 천을 씌운 이른바 담차(毡车)를 제작했다. 수레를 펠트로 덮고 말이 끌게 했으며 수레 겉면에는 오색찬란한 용과 호랑이의 기세를 그렸다. 수레에 그려진 야수들의 눈과 발톱은 금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돌격전이 시작되자마자 화려한 야수의 모습에 말들이 도리어 크게 놀라 달아났고, 적들은 창과 화살을 비 오듯 퍼부어 아군을 쫓아왔다.
적들은 이 담차의 계책을 간파하고 좁은 길목에 마른 짚과 땔나무를 가득 쌓아 두었다가, 담차가 도달하자 바람을 등지고 불을 질렀다. 수레를 끌던 말들이 불길에 놀라 미친 듯이 날뛰었고 담차와 땔나무가 활활 타오르며 뿜어내는 검은 연기와 거센 화염이 하늘을 뒤덮어 아군과 적군이 서로를 분간할 수 없었다. 아군은 적이 그 불길 속에 있는 줄 착각하고 활과 노를 일제히 퍼부었으나, 해가 서산으로 기울 때쯤에야 불길 속에 적이 한 명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군사들이 동관 문에서부터 60~70리에 이르는 좁은 골목길에 가로막혔는데, 북쪽으로는 도도히 흐르는 황하 강물에 막히고 남쪽으로는 깎아지른 바위 절벽(石岸)에 부딪혀 서로 짓밟고 밀치느라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적들은 군사를 빼내어 남산에서 군사를 끄는 시늉을 하며 흙먼지를 일으켜 기만술을 썼고, 산악 지형에 익숙한 동라 부족의 철기군을 보내 황하를 가로질러 아군의 배후를 퇴로를 차단했다. 우리 군사는 여지없이 참패하여 황하 강물에 빠져 죽은 자가 열에 둘셋에 달했다.
가섭한은 북쪽의 높은 언덕 위에서 아군 진영이 밀리고 밀리는 참상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침 황하 북쪽 기슭에 군량을 운반하는 배들이 있는 것을 보고 좌우의 관원들이 배를 가져와 군사들을 건네자고 건의했다. 그리하여 배 100여 척을 남쪽 기슭으로 끌어왔으나, 강물로 먼저 뛰어들어 배에 타려는 군사들이 셀 수 없이 많아 배가 닿는 족족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물속으로 가라앉았으니, 이렇게 침몰한 배가 수십 척에 달했다. 살아남은 패잔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남관(南关)으로 달아났다.
이보다 앞서 관문 옆에 깊이 두 장(丈)여가 되는 큰 참호 두 갈래를 파두었었다. 아군이 참패하여 서로 먼저 달아나려고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사람과 말이 뒤엉켜 참호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깊은 참호가 사람과 말의 시체로 가득 찼고, 뒤따르던 병사들은 죽은 사람과 말의 등을 밟고 지나서야 겨우 관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군의 진형이 완전히 무너지자 적장 최건우는 백기(白旗)를 휘날리며 좌우의 철기군을 거느리고 번개처럼 아군 진영을 짓밟고 다녔는데, 우리 군사들이 바라보기에 그 기세가 흡사 귀신과 같았다. 또한 황색 깃발을 든 적군 수백 대가 나타나자 아군은 그들이 복병인 줄 알고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잠시 뒤 황색 깃발 부대가 최건우의 군사와 격렬하게 싸우는 광경이 보였는데, 황색 깃발 부대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다가 다시 싸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더니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훗날 소릉(현종의 능)에서 보고하기를, 그날 신령을 모신 석인(石人)과 석마(石馬)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날 가섭한은 영보현 서쪽의 홍류간(洪溜涧)에서 최건우와 맞닥뜨렸는데, 가섭한의 병력은 압도적으로 많았고 최건우의 군사는 1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건우는 군사들을 깃발 하나에 15명씩 듬성듬성 배치하여 넓게 퍼뜨리는 이른바 ‘살성진(撒星陣)’을 펼쳤다. 진형이 조밀했다가 흩어지고 전진했다가 후퇴하는 등 종잡을 수 없자, 당나라 관군들은 이를 보고 비웃으며 방심했다. 게다가 최건우는 5,000명의 맹장들에게 길고 거대한 묵도(陌刀, 양날 대도)를 쥐여 진형 뒤에 배치하고 아군의 퇴로를 가로막으며 명했다.
“앞으로 전진하면 15명 중 살아남는 자가 있을 것이나, 뒤로 한 발짝이라도 물러서면 발뒤꿈치를 돌리기도 전에 즉시 목을 벨 것이다!”
이 때문에 적의 군사들은 저마다 목숨을 걸고 광적으로 싸웠다.
최건우는 갑자기 놀란 척 깃발을 거두고 징과 북을 울리며 퇴각하는 시늉을 했고, 당나라 관군은 더욱 나태해졌다. 이때 적들이 돌연 말머리를 돌려 천둥벼락 같은 기세로 짓쳐 들어오니 관군은 진형을 잃고 여지없이 짓밟혔다. 이달에 동풍이 대지를 찢는 듯 거세게 불어 닥쳐 모래바람이 하늘을 뒤덮고 매캐한 흙먼지가 사방에 가득했다. 적들은 들판에 쌓여 있던 마른 잡풀에 일제히 불을 질렀고, 화염이 하늘을 찌르며 온 세상이 칠흑 같은 밤처럼 어두워져 깃발의 색깔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적들은 바람을 등지고 우리 군사를 사정없이 도륙했으니, 먼지와 연기 속에서 당나라 군사들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고스란히 죽임을 당했다.
4. 가섭한의 굴욕적인 포획과 비참한 최후
처음에 가섭한이 동관에 이르렀을 때 중풍(风疾)이 몹시 심하여 군대의 대소사를 직접 돌보지 못하고 행군사마 전량구(田良邱)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휘하 장수인 왕사례(王思礼)와 이승광(李承光)이 서로 우두머리가 되겠다고 연일 불화를 겪었으니, 군사들은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나갔을 때도 채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군사들이 궤멸하고 말았고, 가섭한은 휘하의 오랑캐 출신 번장(蕃將)인 화발귀인(火拔归仁)에게 사로잡혀 안록산에게 강제로 투항당했다.
아군이 참패한 뒤 가섭한은 수양산 서쪽에서 황하를 건너 동관의 관문 나루터 역참으로 들어섰다. 관문이 뚫린 상태에서 장수 왕사례가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한번 맞서 싸우고자 했다. 이때 배신자 화발귀인이 가섭한에게 꼬드겼다.
“도적들의 기세가 맹렬하니 상공께서는 우선 서쪽 장안으로 피하셔서 훗날을 도모하소서.”
가섭한이 말에 올라 역참을 벗어나려 하자, 화발귀인은 돌연 태도를 바꾸어 여러 장수를 이끌고 가섭한의 말머리를 가로막으며 안록산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다.
“후일에 딴마음을 품고 훗날을 도모하더라도 지금 투항하는 것이 결코 늦지 않습니다.”
가섭한이 의연하게 꾸짖었다.
“오랑캐 역적놈이 미쳐 날뛰어 우연히 한 번 이겼을 뿐이다! 천하의 대군이 조만간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니 역적놈의 목이 베여 대궐에 걸릴 날이 아침저녁 사이에 있도다!”
화발귀인이 비웃었다.
“도적의 칼날이 눈앞에 닥쳤는데 언제 대군을 소집한단 말입니까? 장군의 목숨은 이미 도적의 창끝에 걸려 있습니다!”
가섭한이 격노하여 말에서 내리려 하자, 반역자들은 굵은 터럭 밧줄(毛绳)로 가섭한의 두 발을 말의 배 밑으로 꽁꽁 묶어 버리고 말고삐를 잡아채 강제로 역참을 빠져나갔다. 가섭한은 분노에 치밀어 채찍을 쥐고 제 목구멍을 찔러 자결하려 했으나, 반역자들이 채찍마저 빼앗아 버렸다. 결국 말을 몰아 적장 최건우에게 바쳐졌고, 낙양의 안록산에게 압송되었다.
안록산이 사로잡혀 온 가섭한을 비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평소에 나를 몹시 깔보더니, 오늘 꼴이 어떠하냐?”
가섭한은 살고 싶은 마음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비굴하게 아뢰었다.
“이 육안(肉眼)이 어리석어 폐하가 참된 천자이신 줄 몰라보고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폐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실 참된 군주이십니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이광필(李光弼)은 토문에 있고, 내전(来瑱)은 하남에 있으며, 노경(鲁炅)은 남양에 있습니다. 신의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소신이 편지 한 장(尺书)을 써서 그들을 불러 모으겠으니, 며칠 안에 천하가 평정될 것입니다.”
안록산은 몹시 기뻐하며 즉시 가섭한을 사공(司空)으로 삼고, 편지를 써서 이광필 등을 소환하게 했다. 그러나 편지를 받은 당나라 장수들은 답장을 보내어 가섭한이 나라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 것을 몹시 꾸짖고 조롱했다. 안록산은 가섭한이 쓸모없게 되었음을 알고 그를 황실 정원(苑中)에 가두었다가 결국 처참하게 죽여 버렸다.
5. 당 현종의 피난길과 마외파(馬嵬坡)의 참혹한 병변
신묘일 밤, 도성으로 들어오는 봉화(平安火)가 한 차례도 울리지 않자 당 현종은 극도로 두려워했다. 15일 임진일 아침 조정에 소식이 전해지자 현종은 백관을 소집하여 대책을 물었다. 재상 양국충은 촉나라(四川)로 몽진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건의했다.
이보다 앞서 양국충은 촉나라 땅이 기름지고 안전하여 제 몸 하나를 보존할 음모를 꾸며 왔었다. 천하에 군사들이 부족해지자 은밀히 제 심복들을 양주와 익주(촉나라 지역)의 요직에 배치해 두었는데, 마침내 도성이 뚫리자 제 음모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는 양국충 본인의 계책이 아니다”라고 수군거렸는데, 그 자세한 전말은 뒤에 서술하겠다.
감찰어사(监察御史)가 장계를 올려 내탕고의 황금과 비단을 풀어 장사를 모집하고 황실의 6군(六軍)을 이끌고 나아가 결사적으로 도성을 지키자고 건의하니, 뜻있는 이들은 그 드높은 기개에 탄복했으나 그 대책이 몹시 옹졸하다고 여겼다.
일찍이 현종이 구자국(龟兹)의 음악 목록을 살펴보던 중 《북락배대(北洛背代)》라는 곡명을 발견하고 몹시 불쾌해하며 황실 음악가 이구년(李龟年)에게 물었었다.
“어찌 음악의 이름이 이토록 불길하단 말이냐?”
그리하여 전국의 모든 음악 곡명을 상서로운 이름으로 뜯어고치게 했다. 훗날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음악가 이구년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곡명의 불길한 전조가 과연 헛되지 않았구나!”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연간에 세간의 궁조(宮調) 음악 중에서 돌궐의 신을 찬양하는 소리(突厥神)가 유행했는데, 이 또한 안록산의 반란을 예언한 징조였다. 당나라 건국 초기에 전국에 널리 퍼졌던 《무메이랑(武媚娘)》이라는 노래가 뒷날 측천무후가 제위를 찬탈하는 사건으로 이어졌으니, 노래에 담긴 하늘의 전조(显蛔)를 어찌 인간의 얕은 지혜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16일 계묘일 아침, 현종은 마침내 촉나라로 파천(播遷) 길에 올랐다. 황제의 어가가 연추문(延秋门)을 빠져나갈 때 백관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에도 황제에게 하례를 올리러 입궐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대궐 안의 후궁들과 궁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고, 백성들의 나귀와 말이 궁궐 전각 안으로 함부로 드나들며 내탕고의 보물들을 닥치는 대로 실어 날랐다.
어가가 위교(渭桥) 다리를 건넌 뒤, 재상 양국충은 관군과 백성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다리를 불태워 끊어 버리라고 명령했다. 현종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총신 고력사(高力士)를 급히 다리로 보내 말렸다.
“지금 백성들이 사색이 되어 저마다 살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어찌 그들의 생로를 끊는단 말이냐!”
그리하여 고력사로 하여금 군사들을 시켜 다리의 불을 급히 끄게 했다.
어가가 망현궁(望贤宫)에 멈추었을 때, 수행하던 관원들과 군사들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현종은 할 수 없이 어가를 끌던 말들을 잡게 하고 임시 궁궐의 목재를 쪼개어 고기를 삶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궁궐 안뜰의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쉬던 현종은 천하를 통째로 잃어버렸다는 극심한 자괴감에 빠져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곁에 서 있던 고력사가 상황의 처참한 슬픔을 알아채고, 황제의 발을 껴안고 대성통곡(呜咽)했다.
현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짐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수십 년 동안 백성들에게 몹시 몹쓸 짓을 한 적이 없거늘, 변방의 오랑캐(朔胡) 록산이가 배은망덕하여 역모를 꾀하고 종묘사직이 사방으로 뚫렸는데, 정작 짐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근왕병(勤王)이 단 한 명도 없구나. 짐이 종묘사직과 조상들께 큰 죄를 지었으니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는가! 오직 너만이 짐의 찢어지는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느냐.”
현종이 내시를 현 고을로 보내 선포하게 했으나, 함양의 관 관리와 백성 중 어가를 배웅하러 나오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낮(午时)이 지날 때까지 황제는 밥 한 술 뜨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근처 마을의 늙은 촌부(村叟)가 다가와 꿀에 갠 밀가루 떡(蜜面)을 바치니 현종은 눈물을 흘리며 참담하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황실 주방의 관원이 황제의御膳(수라)을 짊어지고 당도하여 곁의 시종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어가가 서둘러 떠나 금성(金城)에 당도해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장수 왕사례가 동관으로부터 도망쳐 당도하여, 가섭한의 군사가 참패하고 관문이 뚫린 전말을 상세히 보고했다.
18일, 어가가 마외파(馬嵬) 역참에 당도했다. 수행하던 재상 위견소와 그의 아들 위악(韦谔), 양국충과 그의 아들 양훤, 위방진(魏方进)과 그의 아들 위원향 등 여섯 사람이 역참 안으로 들어와 황제를 알현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때 마침 토번(吐蕃) 부족의 기병 20여 명이 양국충의 말머리를 가로막으며 호소했다.
“저희는 타국의 오랑캐들이나 우연히 나라의 전란을 만났으니, 부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소서.”
양국충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관군들이 광분하여 소리쳤다.
“양국충이 토번의 오랑캐들과 손을 잡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 위방진도 한패거리다!”
순식간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찬 군사들이 역참을 첩첩이 포위했다.
양국충이 격노하여 소리쳤다.
“록산이가 이미 올빼미와 부엉이 같은 흉악한 역적이 되어 어버이 같은 황제를 핍박하고 있거늘, 너희들마저 도적놈을 본받아 역모를 꾸미려 하느냐!”
군사들이 소리쳤다.
“네놈이 바로 나라를 망친 일등 역적놈이거늘, 누구를 꾸짖는단 말이냐!”
이때 관군의 기병이었던 장소경(张小敬)이 먼저 활을 쏘아 양국충을 말 아래로 떨어뜨린 뒤, 단칼에 그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시신을 난도질했다. 위방진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토번의 사신들도 그 자리에서 참살당했다. 위견소 또한 난폭한 군사들의 칼에 맞아 골통이 깨지고 피가 땅을 적셨다. 군사들 중 의로운 자가 소리쳤다.
“어지러운 간신 놈들 중에 위상공(위견소) 부자는 죄가 없으니 절대 다치게 하지 말라!”
그리하여 위견소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현종은 수왕(寿王)에게 명하여 약을 가져와 위견소의 상처를 봉하게 했다.
그러나 성난 군사들은 여전히 칼을 벼리며 역참을 겹겹이 포위한 채 흩어지지 않았다. 현종이 곁의 백관을 소집했으나, 곁에 남아 있는 대신은 오직 위견소 부자 두 사람뿐이었다. 현종은 짚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몸소 역참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군사들을 달랬다.
“짐이 간신 양국충을 이미 처단했으니, 여러 군사들은 무기를 거두고 물러가라.”
그러나 군사들은 묵묵부답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때 행재소의 도우후(都虞候) 천현례(陈玄礼)가 장수 30여 명을 거느리고 갑옷을 입은 채 나아가 아뢰었다.
“양국충 부자가 이미 처단되었으나, 그의 사촌 누이인 귀비 양태진(楊太真)이 여전히 황제의 곁에 모셔져 있으니 아군이 안심할 수 없습니다. 부디 결단을 내리소서!”
현종이 슬픈 안색으로 답했다.
“짐이 알아서 처분할 것이니 물러가라.”
현종이 발걸음을 돌려 역참 안으로 들어섰으나, 기둥에 몸을 기대어 넋을 잃고 한참 동안 들어가지 못했다. 위견소의 아들 위악이 결단력 있게 극언을 올리자, 마침내 현종은 무거운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고력사가 나아가 귀비를 먼저 만나 사태의 위급함을 전하니, 양귀비는 두 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 일어난 비극은 참으로 소첩이 달게 받을 벌이옵니다. 부디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올릴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마침내 양귀비는 절간의 불당 안에서 비단 줄로 목을 매어 죽었다. 고력사는 귀비의 시신을 가마에 실어 역참 뜰 한가운데에 내려놓고 장수 천현례 등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천현례 등이 투구를 벗어 사죄의 큰절을 올리자 비로소 군사들이 크게 환호하며 포위를 풀었다.
그러나 황제의 어가가 나아갈 방향을 두고 의론이 분분했다. 현종은 본래 안온하고 풍요로운 촉나라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내시 창청(常清)이 나서서 간언했다.
“역적 양국충이 오랫동안 검남(촉나라) 지역에서 군권을 쥐고 세세를 다졌으니, 그곳에 남은 심복들이 반역자와 손을 잡고 딴마음을 품을까 몹시 두렵습니다. 그보다는 오랜 조상들의 터전이자 백성들이 황제의 조회를 눈물로 기다려 온 태원(太原)으로 몽진하심이 가합니다. 그곳은 땅이 넓고 군사들이 많아 머무르시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내시 곽사태(郭师太)는 삭방(朔方)으로 갈 것을 건의했다.
“삭방은 번인과 한인이 뒤섞여 살며 부모와 자식처럼 의리를 숭상하니, 예로부터 그 땅의 이름이 충성과 효도의 고을이라 불렸습니다.”
내시 낙휴상(骆休详)은 농서(陇西)로 가자고 청했다.
“고장(姑臧) 땅은 과거 오량(五涼)의 군주들이 다스리던 왕도로서, 선비들이 두텁고 땅이 비옥하니 진실로 황제의 순행지로 제격입니다.”
백관과 내시 수십 명이 저마다 의견을 올렸으나 현종은 모두 윤허하지 않고, 오직 심복 고력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고력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태원이 비록 가까우나 도적들의 근거지와 맞닿아 있고, 예전에 안록산의 관할 아래 있었으니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삭방은 변방 국경과 가깝고 온통 오랑캐들이 득실거리니 그들을 다스리기 몹시 어렵고 황제의 깊은 뜻을 전하기 힘듭니다. 서량은 길이 너무 멀고 사막이 쓸쓸하여, 대군의 어가가 움직이기에 말과 사람의 수가 많아 군량이 부족해지면 순식간에 참담한 지경에 처할 것입니다. 촉나라는 비록 좁다고는 하나 땅이 기름지고 인재들이 강성하며, 산과 강이 첩첩이 가로막혀 안팎이 견고하고 험난한 천혜의 요새입니다. 소신의 얕은 지혜로는 촉나라로 몽진하심이 가장 온당합니다.”
현종이 무릎을 치며 찬성했다.
“너의 계책이 100번 옳도다!”
그리하여 어가는 촉나라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이때 황태자(숙종)는 근방 백성들의 눈물어린 만류로 길을 돌려 북쪽 영무(灵武)로 향하여 마침내 제위에 올랐다.
6. 장안 낙양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과 음악가 뇌해청의 참혹한 순국
17일 갑오일, 도적들이 마침내 당나라의 수도 서경(장안)을 함락했다. 처음에 안록산은 현종이 촉나라로 이토록 신속하게 도망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에 군사의 진격이 더디었다. 그리하여 도성에 입성한 안록산의 수하 적들은 조정의 국고와 무기고의 보물, 국가의 수많은 도서와 지리 서적, 그리고 황실의 가무인인 의춘 운소의 악인들, 남해의 서뿔과 코끼리, 궁중에서 묘기를 부리던 춤추는 말(舞马), 후궁의 미녀들을 모조리 노략질하여 단 한 명도 남기지 않았다.
안록산은 수레에 황실의 악기와 악인들을 가득 싣고 그들을 협박하여 음악을 연주하게 했으며, 쇠사슬로 황실 코끼리를 묶어 끌고 가고 춤추는 말들을 채찍질하여 낙양(동도)으로 보냈다. 이어 이 보물과 예인들을 다시 북방 오랑캐 땅으로 흩뿌렸으니, 당나라 천 년의 번창한 문화가 순식간에 빗자루로 쓴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훗날 숙종황제가 도성을 탈출하여 수복한 뒤, 민간에 흩어진 이 예인들과 보물들을 찾아 대궐로 환수했으나 열에 겨우 둘셋을 구했을 뿐이었다.
안록산이 낙양에 당도하여 제위를 찬탈한 뒤, 거창하게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안록산은 요동과 변방의 여러 오랑캐 추장들이 황실의 묘기를 본 적이 없을 것이라 여겨 큰소리를 쳐댔다.
“내가 천하를 쥐자, 남해의 무서운 서뿔과 코끼리들이 스스로 달려와 나에게 큰절을 올리며 춤을 추었다. 날짐승과 길짐승조차 하늘의 천명이 나에게 있음을 아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느냐! 천하가 어찌 나를 따르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안록산이 좌우의 수하들에게 명하여 쇠사슬에 묶인 황실 코끼리들을 끌고 오게 했다. 그러나 끌려온 코끼리들은 눈을 부릅뜨고 씩씩거리며 격노할 뿐, 단 한 마리도 록산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춤을 추지 않았다. 안록산은 추장들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하자 대꿀멍하며 이글거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명령했다.
“이 짐승 놈들을 깊은 구덩이(穽井) 속에 처넣고 뜨거운 불을 질러 완전히 녹초로 만들어 버려라! 코끼리들의 힘이 다 빠지거든 힘이 센 천하장사들을 구덩이 위에 세워 돌덩이를 던져 죽여라!”
장사들이 위에서 큰 돌을 내리던지니 돌이 코끼리들의 가슴과 옆구리를 관통하여 뼈가 으스러졌고, 구덩이 안에는 수십 석(石)에 달하는 핏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이 비참한 참상을 지켜보던 황실의 늙은 예인과 악사들은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하고 소리 없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안록산은 특히 대궐의 악인들에게 집착하여 이들을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뒤쫓았는데, 열흘도 채 되지 않아 배나무 정원의 기예인인 이른바 여원제자(梨园弟子) 수백 명을 체포해 냈다. 도적의 무리들이 낙양의 아름다운 연못인 응벽지(凝碧池)가에 모여 거짓 조정의 벼슬아치 수십 명을 앉혀 두고 거창하게 잔치를 벌였다. 그들 앞에는 대궐 내탕고에서 빼앗은 휘황찬란한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풍악이 웅장하게 울려 퍼지자, 억지로 악기를 잡은 황실의 여원제자들은 조국의 참참한 멸망에 가슴이 미어터져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도적들이 시퍼렇게 날 선 칼과 창을 그들의 목에 겨누며 협박했으나, 슬픔에 겨워 악기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이때 당나라의 악사였던 뇌해청(雷海清)이 격분하여 쥐고 있던 악기를 땅바닥에 팽개쳐 깨뜨려 버리고, 황제가 계신 서쪽 도성을 향해 목을 놓아 대성통곡을 했다. 안록산이 머리끝까지 노하여 부하들에게 명했다.
“저 무도한 놈을 말 타는 기예를 부리던 희마대(戏马台) 기둥에 단단히 묶어라! 그리고 다른 악사들이 똑똑히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사지를 하나하나 찢어 발겨 죽여 버려라!”
마침내 의로운 악사 뇌해청은 온몸이 찢기는 거열형을 당해 장렬히 순국했으니, 이 비보를 전해 들은 천하의 의로운 이들은 가슴을 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시 당나라의 대시인 왕유(王维) 또한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적들의 아귀에 걸려 보리사(菩提佛寺) 절간에 갇혀 있었다. 뇌해청이 참혹하게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왕유는 절간 방 안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어 저 유명한 시 한 수를 지어 남겼다.
“만 가구의 한 맺힌 눈물 속에 들판에는 잡풀의 연기만 피어나니, 조정의 백관들은 어느 날에나 다시 황제를 모시고 하늘을 뵈올까.
낙엽 지는 가을 괴화나무 아래 쓸쓸한 빈 궁궐인데, 응벽지 가에서는 적들의 풍악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구나.”
왕유는 본래 개원 초기에 진사 시험에 급제한 인물로, 제 어머니 최씨를 극진한 효성으로 모셔 천하에 효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급사중(给事中)의 높은 관직에 올랐었다. 안록산이 장안을 함락했을 때, 왕유는 적들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미친 척(佯狂)을 하거나 벙어리 흉내(失音)를 내며 오랫동안 숨어 지냈다. 그러나 적들은 그의 드높은 시명(詩名)을 탐내어 그를 기어코 찾아내어 낙양으로 압송했고, 강제로 거짓 조정의 급사중 벼슬을 내렸다.
지덕(至德) 2년 겨울, 당나라 관군이 마침내 동경(낙양)을 수복한 뒤, 도적에게 굴복하여 벼슬을 지냈던 당나라 관원들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엄히 다스렸다. 이때 왕유의 친동생이자 형부시랑의 높은 벼슬에 있던 왕진(王缙)이 황제에게 나아가 간절히 장계를 올렸다.
“청컨대 소신의 높은 관직과 벼슬을 모두 반납하고 제 한 몸을 깎아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니, 부디 제 형님 왕유의 죄명을 사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상원(上元) 원년에 숙종황제는 왕유를 특별히 사면하여 도성의 황태자 중윤(太子中允)으로 삼았고, 뒷날 상서우승(尚书右丞)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왕유는 말년에 망천(辋川)에 아름다운 별장을 짓고, 조정의 조회가 끝나 물러나면 늘 방 안에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향을 피우며 참선을 행했다. 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30년 동안 홀로 방 한 칸을 쓰며 고적하게 지내며 세상의 온갖 번뇌와 먼지를 완전히 끊어 냈다. 마침내 그가 임종을 맞이했을 때, 동생 왕진은 멀리 봉상(凤翔) 땅에 가 있었다. 왕유는 담담하게 동생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 편지와 평생의 오랜 벗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써서, 부디 불법을 닦고 도를 닦을 것을 권한 뒤 가만히 붓을 내려놓고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7. 안록산의 독재와 처참한 인과응보
안록산은 하남과 요동을 훔쳐 차지한 뒤, 재상 장통유에게 낙양을 굳게 지키게 하고 맹장 안수충(安守忠)에게 대군을 주어 서경(장안)을 진수하게 하니, 이때 당나라의 두 도성이 모조리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지덕 원년 9월, 안록산의 수하 적당이었던 손효철(孙孝哲)은 장안에서 당나라 현종의 누이인 곽국장공주(霍国长公主)와 영왕비(永王妃), 그리고 부마 양일(杨馹) 등 황실 종친과 대신 80여 명을 체포하여 쇠몽둥이로 머리를 쳐 죽였다. 손효철은 이들의 가슴을 칼로 째어 심장을 통째로 꺼낸 뒤, 장안에서 거열형을 당해 죽은 안록산의 맏아들 안경종(安庆宗)의 제단에 피를 뿌리며 제사 지냈다. 안경종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던 해 11월 27일, 그의 어머니 강씨(康氏) 등 다섯 명과 함께 장안 저자거리에서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斩)을 당했으며, 며느리였던 영의공주(荣义公主) 역시 사약을 받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안록산은 제 아들이 참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성을 잃고 광분하여,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자들을 사정없이 도륙했다. 황제를 따라 촉나라로 피난 간 승상과 장수들의 도성에 남은 자손과 형제들은 요람에 누워 젖을 빠는 갓난아이(婴孩)라 할지라도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고 모조리 도끼로 찍어 죽였다.
이후 안록산은 깊은 장막 뒤에 숨어 거만하게 걸터앉아 잔인무도한 폭정을 일삼았다. 그의 수하 대장군들조차 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고, 대소 군사는 오직 책사 엄장(嚴庄)을 통해서만 보고를 올릴 수 있었다. 그의 잔인함과 포악함이 흡사 굶주린 이리나 호랑이 같아서, 비록 제 뱃가죽을 나누어 준 심복이나 자식이라 할지라도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몰라 저마다 원수(仇敌)처럼 대했다.
이보다 앞서 백성들은 전란의 와중에 굶주림에 못 이겨 황실 창고에 들어가 식량을 노략질했었다. 장안에 입성한 안록산은 이에 극도로 분노하여 사흘 동안 장안의 가가호호를 이 잡듯 뒤져 대수색을 벌였다. 백성들의 개인 재산과 쌀 한 톨까지 가차 없이 빼앗았다. 또한 관아에 명하여 자백을 받아내고 억지로 증인을 옭아매어, 날마다 세금을 가혹하게 뜯어내고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 가두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뾰족한 칼끝이나 송곳 끝만 한 재물이라 할지라도 모조리 징수하니, 견디다 못한 장안 백성들이 사방에서 봉기를 일으켜 도적의 관원들을 찔러 죽였다.
날마다 첩보원들이 당나라 조정의 기쁜 소식을 전해 오자, 도성의 선비와 백성들은 남몰래 밤마다 모여 도성을 탈출할 음모를 꾸몄다. 숙종황제가 영무에 당도하여 대군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백성들은 모두 목을 빼고 관군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렸다. 저잣거리에는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태자 전하께서 서쪽에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신다!”
백성들이 기뻐 날뛰며 피난 길에 오르니 장안의 번화하던 시장과 상점들이 순식간에 텅 비어 삭막해졌다. 이러한 풍경이 백여 일 동안 지속되었다.
도성 근방의 의로운 호걸들과 도적들에게 사로잡혀 억지로 벼슬을 지내던 당나라 관원들이 탈출하여 삭방의 조정으로 귀순하는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도적들이 길목을 막고 도망자들을 잡는 족족 목을 베어 죽였으나, 의로운 귀순자들은 끊임없이 일어나니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다.
처음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도성 근방에서부터 부방, 기주, 농서에 이르기까지 온 고을이 안록산의 포악한 위세에 눌려 굴복했었다. 그러나 이제 관군이 서쪽 성 밖에 당도하여 굳건한 적수로 마주 서게 되었다. 안록산 휘하의 장수들은 용맹하기만 할 뿐 머리가 둔하여, 날마다 진영에 틀어박혀 가마솥에 술을 끓여 마시고 기생들을 끌어안고 금은보화를 낭비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서쪽 장안으로 진격하여 군사적 위업을 세우겠다는 뜻은 털끝만큼도 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나라 숙종황제는 도적들의 나태함과 틈을 타서 손쉽게 수복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당나라를 보살핀 천명(天命)이었다.
도적들의 흉포한 칼날이 닿는 곳마다 고을이 쑥대밭이 되고 백성들이 도륙당했으나, 의로운 백성과 관원들이 영무군으로 귀순하기 위해 피난하는 행렬이 사방에 가득했다. 백성들의 가솔들은 도적을 피해 도망쳐 강남의 강淮(양쯔강과 회하 강가) 지역으로 피난했다.
천보 초기에 장안의 귀족과 부유한 백성들 사이에는 기이하게도 오랑캐의 복장(胡服)을 입고 다니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남자들은 표범 가죽으로 만든 둥근 모자(豹皮帽)를 쓰고 다녔고, 부녀자들은 걸을 때마다 펜던트 장식이 요란하게 살랑거리는 화려한 머리핀인 보요(步搖)를 꽂았으며, 옷깃과 소매를 아주 좁고 딱 붙게 재단한 소매 좁은 오랑캐 옷을 즐겨 입었다. 당시 안목이 뛰어난 선비들은 이 기괴한 유행을 몹시 괴이하게 여기며 한탄했다.
“머지않아 온 나라가 오랑캐의 말발굽 아래 짓밟힐 흉악한 전조(兆)로다!”
도적들에게 함락당한 주현의 백성들은 도적의 군사가 당도하면 억지로 복종하여 성을 지켰으나, 도적들의 대군이 다음 고을로 떠나기만 하면 즉시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남겨진 도적의 장수들을 찔러 죽이고 당나라 깃발을 내걸며 귀순했다. 이러한 반복이 수십 차례에 달해 고을들이 참혹하게 짓밟혀 돌무더기 폐허(墟)로 변했으나, 백성들의 뜨거운 충심은 끝내 꺾이지 않았다. 이윽고 숙종황제가 영무에서 대군을 훈련하여 복수를 맹세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의 충심은 더욱 단단한 강철처럼 굳어졌다.
안록산은 말년에 끔찍한 눈병(眼疾)을 앓아 눈이 날로 침침해지더니 마침내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었다. 또한 온몸에 지독한 종창과 악창이 돋아나 뱃가죽이 썩어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고 몸이 몹시 아프자 안록산의 성품은 더욱 포악하고 잔인해졌다. 제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좌우의 시종들을 채찍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펐고, 곁을 지키던 내시들이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즉시 대도나 도끼를 휘둘러 목을 베어 버렸다.
안록산은 제 첩실이었던 단씨(段氏)를 지극히 총애하여, 단씨가 낳은 어린아들 안경은(安庆恩)을 맏아들 안경서(安庆绪)를 제치고 대연국의 후사(嗣)로 삼으려 했다. 맏아들 안경서는 제 지위가 폐위되고 언제 아버님께 목이 잘려 죽을지 몰라 날마다 공포에 떨었다. 책사 엄장 또한 안록산의 눈병이 깊어지고 성질이 날로 지랄 맞게 변하자, 궁궐 안에서 정변이 일어나 자신마저 처형당할까 몹시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엄장은 깊은 밤에 안경서 및 안록산이 가장 신임하던 내시인 이저아(李猪儿)를 은밀히 불러 모의했다.
엄장이 안경서의 손을 잡고 꼬드겼다.
“태자 전하께서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대의를 위해 친부모마저 척살한다는 대의멸친(大义灭亲)의 도리를 아십니까? 자식과 신하의 처지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는, 결단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안경서는 비록 오랑캐(胡)의 핏줄을 받아 성품이 비겁하고 나약했으나, 연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터라 울면서 찬성했다.
“형님이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엄장이 다시 내시 이저아를 돌아보며 협박했다.
“네놈이 황제(안록산)를 모시면서 매 맞고 살이 찢긴 상처가 도대체 그 수를 헤아릴 수 있더냐! 만약 오늘 밤 큰일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네놈은 조만간 몽둥이에 맞아 개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덕 2년(757년) 정월 5일 밤, 마침내 세 사람은 안록산을 시해할 피비린내 나는 모의를 실행에 옮겼다. 책사 엄장과 아들 안경서는 날카로운 칼을 쥐고 안록산의 침전 장막 밖에 굳건히 서서 보초를 섰고, 힘이 장사였던 내시 이저아는 거대하고 날카로운 대도를 품에 쥐고 장막 안으로 소리 없이 침투했다. 침상 머리맡에 다가선 이저아는 대도를 치켜들어 안록산의 깊은 아랫배를 사정없이 내리찍고 휘둘러 길게 째 버렸다. 곁을 지키던 호위 군사들은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된 채 감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눈이 보이지 않던 안록산은 평소 침상 머리맡에 보검을 걸어두고 자던 터라, 아랫배가 갈라지는 극심한 고통 속에 침입자가 들이닥쳤음을 단박에 깨달았다. 안록산이 침상을 더듬으며 보검을 찾았으나 보검은 이미 이저아가 빼돌린 뒤였다. 안록산은 다급하게 침상 기둥을 흔들며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이 역적놈아! 이는 필시 엄장(嚴庄)이가 꾸민 짓이로다!”
비명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잘려 나간 아랫배에서 수십 되(斗)에 달하는 뜨거운 창자와 핏물이 침상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안경서와 엄장이 침전으로 들어와 침대 밑의 흙바닥을 깊이 파내어 구덩이를 만든 뒤, 안록산의 비대한 시신을 두터운 펠트 천(氈)으로 둘둘 말아 구덩이 속에 처넣고 흙을 덮어 비밀리에 매장했다. 그리고 대궐의 시종들에게 함구령을 내려 역모의 전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입을 막았다.
다음 날 아침, 책사 엄장은 짐짓 태연한 낯빛으로 대궐 밖에 선포했다.
“황제께서 갑작스러운 악창이 깊어져 위독하시므로, 황태자 안경서에게 제위를 선위한다는 조서를 내리셨다. 오늘부터 군국의 크고 작은 모든 대사는 황태자께서 친히 주재하신다!”
그리하여 안경서가 마침내 거짓 제위에 올랐고, 아버님 안록산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존봉했다. 안경서는 성품이 나약하여 매사 책사 엄장을 형님으로 모시며 모든 조언을 구하고 그의 손아귀에 휘둘렸다.
안록산의 아랫배를 갈라 죽인 내시 이저아는 본래 거란 부족의 포로 출신이었다. 열 살 무렵에 사로잡혀 안록산의 집으로 끌려와 시종을 들었는데 성품이 지극히 꼼꼼하여 안록산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안록산이 그의 꼼꼼함을 아껴 고자(궁형)로 만들었을 때, 어린 이저아는 가랑이에서 수 되의 피를 쏟아내며 거의 죽을 뻔했다가 겨우 수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안록산은 어릴 때부터 이저아를 친아들보다 더욱 신임했다.
안록산은 뱃가죽이 몹시 비대하여 평소에 옷을 입을 때마다 곁에서 힘이 센 세세 명의 장사들이 양손으로 그의 축 늘어진 뱃가죽을 치켜들어야만 했다. 그러면 내시 이저아가 제 머리로 안록산의 뱃가죽을 밑에서 받치고 들어가 겨우 허리띠를 묶어 주었다. 현종황제가 일찍이 안록산에게 화청지(華清宮) 목욕탕에서 목욕할 수 있는 특권을 하사했을 때도, 오직 내시 이저아만이 목욕탕 안으로 동행하여 안록산의 옷을 벗기고 몸을 씻겨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안록산은 성품이 극도로 포악하여 이저아에게 사사건건 채찍질을 가해 뼈가 부러지게 펐으니, 결국 제 아랫배를 난도질당해 창자가 쏟아져 죽는 끔찍한 인과응보를 당하고 말았다.
8. 안경서의 처참한 패퇴와 사사명의 배신
안록산은 천보 14년 을미년 11월에 반란의 횃불을 들어, 지덕 2년 정월에 제 아들과 내시에게 살해당했으니, 제위를 참칭하여 미쳐 날뛴 세월이 겨우 3년이었고 향년 55세였다.
지덕 2년 8월 25일, 당나라 관군이 향적사(香積寺) 전투에서 도적의 맹장 안수충 등을 대파했다. 분양군왕 곽자의가 대군을 이끌고 도성 남쪽으로부터 진격하여 마침내 서경(장안)을 향해 보무당당히 수복해 들어갔다. 28일에 원수였던 황태자(훗날의 당 대종황제)가 백성들의 환호 속에 장안성 안으로 진격하여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10월 6일에는 동도(낙양)마저 관군에 수복당하니, 도적의 수괴 안경서는 낙양을 통째로 비워 둔 채 보따리를 싸서 하북의 강가(河朔) 땅으로 비참하게 도망쳤다. 10월 23일에 황제의 어가가 성대하게 장안성으로 복귀했고, 그날 상황(현종) 또한 성도(成都)를 떠나 장안으로 출발했다.
안경서가 낙양에서 패하여 도망칠 때, 그를 따르던 보병은 겨우 3,000명에 불과했고 기병은 고작 300~400명에 지나지 않았다. 패잔병들이 신향(新乡) 땅에 당도했을 때, 책사 엄장마저 대세를 보고 당나라 조정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적의 장수들은 군심이 흙빛으로 변해 뿔뿔이 흩어졌다.
반란군의 돌격대였던 아시나승경(阿史那承庆)의 부족들과 이입절(李立节), 안수충, 이귀인(李归仁) 등 핵심 장수들은 모두 안경서를 버리고 항주와 조주 땅으로 달아나 버렸다. 맏아들 안경서의 곁에 남은 장수는 오직 장통유와 최건우 단 두세 사람뿐이어서, 날마다 그들만이 천막 밖에 서서 눈물로 알현할 뿐이었다. 위주(卫州)에 이르자 안경서를 배웅하러 나오는 장수가 단 한 명도 없었고, 탕음(汤阴)에 이르자 군사들의 절반 이상이 밤마다 탈출하여 도망쳤으며 곁에 남은 자들마저 멀리 떨어져 텐트를 치고 경계했다.
안경서는 군심이 완전히 떠나갔음을 깨달았으나 감히 군사들에게 연유를 묻지도 못했다. 상주(相州)에 도달하자 군사들이 모조리 흩어지고 곁에 남은 졸개는 겨우 피로에 지친 보병 1,000명과 기병 300명뿐이었다.
패잔병들이 위태롭게 번방의 경계인 부양현(滏阳)에 당도했을 때, 마침 하동절도사 이광필이 1만 명의 장사와 기병 300명을 거느리고 부양에 굳건히 주둔하고 있었다. 안경서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사면초가가 되자, 제 동생들을 둘러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차피 도망쳐 봐야 굶어 죽거나 목이 잘릴 판이다! 차라리 적들의 칼날 앞에 당당히 부딪혀 목숨을 결단 내자!”
그리하여 안경서는 동생 안경화(安庆和) 등 세 사람과 함께 집안의 사병(가동) 수백 명을 거느리고, 깊은 밤에 목숨을 건 기습 기만 진법을 펼쳐 관군을 급습했다. 이광필의 관군은 방심하고 있다가 허를 찔려 여지없이 궤멸당했다. 불과 4~5리 뒤에 주둔하고 있던 澤潞절도사 왕사례 또한 이광필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사색이 되어 군사들을 흩뜨리고 도망쳤다.
안경서는 뜻밖의 대승을 거두자 신이 나서 군사들을 여덟 갈래로 나누어 대포(露布)를 널리 띄우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대연의 대군이 이광필과 왕사례의 두 군대를 완전히 대파하고 수만 명의 목을 베었다! 관군의 군막과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우리 군사의 군량이 흘러넘치고, 마침내 우리를 돕던 회흘(回鹘)의 기병마저 철수했으니 다시 한번 대업을 세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과거 사방으로 흩어졌던 패잔병들이 안경서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자, 딴마음을 품고 숨어 지내던 도적 무리들이 대거 마음을 돌려 상주 성안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0월 한 달 동안 상주에 모여든 역적의 무리가 다시 수만 명에 달했다. 안경서는 기고만장해져 상주를 안성부(安成府)라 칭하고 대대적으로 사면령을 내렸으며 연호를 천화(天和)로 고쳤다. 그리고 명장 설숭(薛嵩)에게 명하여 신병과 노병 3만여 명과 철기군 6,000명을 혹독하게 조련시켰다.
열흘도 채 되지 않아, 거짓 장수 채희덕(蔡希德)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평으로부터 귀순해 왔고, 전승사(田承嗣)가 영천으로부터 군사를 몰아 당도했으며, 무령순(武令珣)이 당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도달하니 도성 앞길을 메운 도적의 군사가 순식간에 6만 명에 육박했다.
이듬해 6월 14일, 분양군왕 곽자의가 상황의 명령을 받고 장안을 떠나 16만 대군을 이끌고 위주성 아래에 당도했다. 안경서는 군사 10만 명을 이끌고 맞서 싸웠으나 수차례 격돌 끝에 모조리 패했다. 안경서의 동생 안경화는 제 활솜씨만 믿고 홀로 적진에 날뛰며 화살을 쏘아 대다가, 관군의 집중 화살을 맞고 창을 떨어뜨린 채 말 아래로 굴러떨어져 사로잡혔다.
안경서는 대패하여 야음을 틈타 상주성 안으로 기어들어 가 문을 닫아걸었다. 곽자의는 사방의 관군을 규합하여 설겸훈(薛兼训), 동진(董秦) 등 총 21만 대군을 거느리고 상주성 서남쪽 30리 밖에 철옹성 같은 진영을 구축했다.
11월 5일, 안경서는 5만 명의 군사를 쥐고 수사강(愁思冈) 언덕에 진을 치고 맞섰으나, 대패하여 군사 2만여 명이 참살당했다. 관군은 여세를 몰아 상주성 사방에 깊은 참호(濠)를 파고 성을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안경서는 남은 졸개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와 발악했으나 나가는 족족 대패하여 결국 성안에 갇혀 버렸다.
한편, 안록산의 맹장이었던 사사명(史思明)은 본래 유주와 계주 땅을 굳게 지키며 북방을 진수하고 있었다. 안경서가 서경과 낙양에서 패하여 북방으로 도망치자, 사사명은 당나라 조정의 첩자였던 오승은(乌承恩)을 때려 죽이고 도리어 조정의 깃발을 꺾고 다시 반역을 꾀했다. 성안에 갇혀 사면초가가 된 안경서는 날마다 사사명에게 눈물로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애걸했다.
“부디 대군을 이끌고 와서 이 아우를 살려주소서!”
마침내 사사명이 하북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안경서를 구원하러 당도했다.
도적들의 무리가 연주성 밖으로 쏟아져 나오니 때는 건원(乾元) 2년(759년)이었다. 사사명은 위주(魏州)에 이르러 제멋대로 연왕(燕王)을 칭하고 연호를 순천(顺天)이라 고친 뒤, 초왕교(楚王桥) 다리목에 전군을 주둔시켰다. 이어 심복 이귀인에게 정예 병사 1만 명을 주어 산길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하게 했다. 곽자의는 황제에게 하사받은 보검을 쥐고 장수들을 독려했다.
동이 틀 무렵 관군이 적들의 배후를 바짝 추격했고, 적들 또한 군사를 멈추어 해가 질 때까지 세 차례나 격렬하게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이귀인의 군사가 대패했고, 거짓 낙주절도사 장령휘(张令晖)와 병마사 범수엄(范秀严)이 생포당했다. 골짜기와 개울가에는 도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피가 강물처럼 흘러 넘쳤다. 이귀인은 간신히 부양으로 도망쳐 패잔병들을 수습했고, 이 비보를 들은 사사명은 크게 두려워했다.
곽자의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사사명의 군사를 소탕하려 했으나, 장수들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아 군사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하여 곽자의는 장수 이광심(李广琛)과 머리를 맞대고 기막힌 책략을 냈다. 안양하(安阳河) 강물을 끌어다 상주 성안을 통째로 침수시켜 버리기로 한 것이다. 관군은 강둑을 쌓고 물길을 터서 대대적으로 수공(水攻)을 가했다. 상주 성안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백성들과 군사들이 빠져나갈 길목이 완전히 막혔고, 식량이 바닥나 굶어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때 사사명이 대군을 몰아 들이닥쳐, 강둑을 지키던 관군의 보초들을 찔러 죽이고 쌓아둔 둑을 단박에 터뜨려 버렸다. 이어 위위현(卫尉县)을 기습하여 군량 수레 50여 척을 불태우고 수만 마리의 소와 양을 약탈해 가니 관군 장사들의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고 흩어졌다.
건원 2년 2월 기미일,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상주 성안의 안경서 군사들은 저마다 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는(易子而食) 끔찍한 지옥도를 연출했고, 말에게 먹일 풀이 없어 썩은 나무 조각을 갈아 말똥과 섞어 씻어내어 말에게 먹였다. 관군은 보급로가 끊겨 오고 가기가 몹시 험난했고, 원수 곽자의와 이광필의 의견이 맞지 않아 군심이 흔들렸다. 그들은 업현(邺县) 남쪽 10리 밖의 한릉산(韩陵山) 동쪽 물가에 대대적으로 진형을 펼치고 적들과 대치했다.
처음에 관군이 승세를 타서 수많은 적들을 베어 넘기고 포로로 잡았으나, 사사명이 절체절명의 곤경 속에서 돌연 기막힌 기만 철기 계책을 펼쳐 관군을 대파했다. 이때 돌연 대지를 뒤흔드는 광풍이 휘몰아쳐 모래바람과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어 대낮인데도 칠흑 같은 밤처럼 캄캄했다. 성안에 갇혀 있던 안경서의 군사들이 성벽 위에서 멀리 아군이 회군하는 광경을 바라보고는, 관군의 구원군이 도달한 줄 오해하고 겁을 먹어 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내팽개치고 궤멸해 버렸다. 곽자의 등은 온갖 보물과 장비를 버려둔 채 서둘러 퇴각했다. 곽자의는 수리 밖으로 도망쳐 군사를 멈추고 장수들과 사방 진형을 굳건히 짜서 퇴로를 지켰으나 관군의 장사 중 열에 둘셋이 목숨을 잃었다.
사사명은 대승을 거두고 전군을 몰아 상주성 아래에 들이닥쳤다. 안경서는 크게 기뻐하여 성 밖 30리까지 사신을 보내어 황제들이 입는 황포(赭黄衣)를 바치며 사사명을 참된 황제로 모시겠다는 조서(册)를 전했다.
사사명이 거만하게 콧방귀를 꼈다.
“황제의 황포 따위는 필요 없으니, 네놈은 당장 나와서 나를 대면하라!”
안경서는 제 동생 다섯 명을 이끌고 안양하 강물을 건너 10리 밖까지 기어 나와 사사명을 영접했다. 안경서가 사사명의 말 앞에 무릎을 꿇고 내리려 하자 사사명이 이를 말렸다.
“황제 전하께서 어찌 오랑캐 장수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까. 말머리를 돌려 성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안경서는 사사명의 뒤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당시 안경서 휘하에서 황실의 대신을 지내며 안록산 사후에 악행을 일삼았던 거짓 형부상서 손효철, 시중 고상, 병부상서 최건우 등 아홉 명의 괴수들이 사사명을 환영하기 위해 격식 있는 격구장(球场)에 줄을 서서 넙죽 절을 올렸다. 사사명은 이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소리쳤다.
“저 간사한 역적놈들의 목을 당장 쳐라!”
그리하여 개국 공신을 사칭하던 고상과 손효철 등 아홉 명의 머리가 그 자리에서 뎅강 잘려 나갔다.
사사명은 안양하 북쪽 기슭에 대군을 멈추어 쉬게 했다. 사사명이 은밀히 제 처소의 의자에 거만하게 걸터앉자, 안경서 형제들이 뜰 아래에 동서로 나뉘어 사시나무 떨듯 서 있었다.
사사명이 안경서를 가리키며 수백 마디의 욕설을 퍼부으며 죄상을 낱낱이 꾸짖었다. 그 꾸짖음의 마지막 마디는 이러했다.
“네놈은 도대체 무슨 해괴한 역모 죄로 어버이 같은 태상황(안록산)을 찔러 죽이고 제위를 찬탈했느냐!”
사사명이 좌우의 무사들에게 호령하여 안경서를 마당 서쪽 구석으로 끌고 가 비단 줄로 목을 매어 찔러 죽였고, 그의 동생 네 명 또한 칼로 목을 베어 버렸다.
안경서가 참살당하기 전, 도성에는 이런 도요와 참언(谶)이 백성들 사이에 떠돌았었다.
“강을 건너는 들여우(野狐)의 꼬리가 몹시도 나풀거리는구나, 내년 18일에 제 목숨이 붉은 칼날 아래 끝나리라.”
또 다른 참언이 있었다.
“오랑캐의 대가 끊어지는 날, 합하구(合河口) 강가에서 제 시신이 뒹굴리라.”
안경서가 안양하 강가의 합하구에서 제 동생들과 함께 목이 잘려 목매달려 죽으니, 도성 백성들의 참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은 것이다.
당시 사사명의 군사들 중에는 은밀히 안경서와 손을 잡고 사사명을 찔러 죽이려 모의했던 자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옛날 안록산이 베풀어준 두터운 은혜를 잊지 못해 의리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변을 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안경서가 비겁하게 성문을 열고 나와 기어 다니며 항복해 버리자 여러 군사는 분통이 터져 가슴을 쳤다. 안경서 휘하의 정예 군사 6,000여 명은 오랫동안 성안에 갇혀 굶주린 탓에 서 있을 힘조차 없는 가련한 해골 몰골이었다. 사사명은 명장 안태청(安太清)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 살을 찌우게 조련시켰다. 그러나 군사들 중 3,300명이 끝까지 안경서를 추종하던 심복들임을 알아채고, 밥을 든든히 먹인 뒤 가차 없이 구덩이에 처넣어 몰살했다. 이로써 안록산의 피붙이와 잔당 무리는 천하에서 완전히 대가 끊겨 박멸(歼)당했다.
9. 사사명의 제위 찬탈과 그의 기괴한 시문(詩文) 편벽
안경서는 지덕 2년에 제 아버지를 죽이고 거짓 제위에 올랐다가, 건원 2년 기해년에 사사명에게 참살당했으니 그 자리를 보존한 날이 겨우 3년이었다.
사사명은 안경서를 척살한 뒤 대연국의 황제를 자칭했다. 사사명은 안록산이 세운 나라를 정통 대연국이라 부르고, 거짓 사관인 관직(官稷, 혹은 관직일)에게 명하여 안록산과 안경서의 묘지명(墓志)을 지어 바치게 했다. 그러나 안록산의 시신은 이미 이저아가 흙바닥에 처넣어 썩어 문드러진 터라 시신을 찾을 수 없었기에, 그의 아내 강씨와 함께 옷가지를 묻어 넋을 부르는 초혼장(招魂)을 베풀어 정중히 안장했으니 이를 일컬어 슬픈 묘지명이라 했다. 사사명은 안록산의 시호를 광렬황제(光烈皇帝)라 올렸고, 존속살해를 저지른 안경서는 한 단계 강등하여 진자왕(进刺王)으로 봉했다. 사관이 바친 그들의 묘지명에는 온갖 흉악하고 역모를 찬양하는 망령된 언사(语非典实)가 가득하여 도저히 읽을 만한 가치가 없었기에, 역사서에서 낱낱이 생략하여 싣지 않았다.
사사명은 본래 영주(營州) 출신의 여러 오랑캐 피가 뒤섞인 잡종 호인(杂种胡)이었다. 본명은 솔간(窣干)이었는데, 일찍이 당 현종이 그의 말타기 능력을 아껴 사사명이라는 충성스러운 이름을 하사했었다. 몸이 몹시 빼마르고 왜소했으며 수염이 거의 돋지 않았고 눈이 깊고 튀어나왔으며 어깨가 매 부리처럼 굽어(深目鸢肩) 성품이 극도로 조급하고 잔인했다.
안록산과 한고향 출신으로, 태어난 날이 안록산보다 겨우 하루가 빨랐다. 사사명은 섣달그믐날 밤(岁夜)에 태어났고 안록산은 정월 초하루 아침(岁日)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자라면서 몹시 친밀하게 지냈고, 저마다 말타기와 활쏘기가 신의 경지에 달해 변방에 이름이 드높았다. 사사명은 변방 오랑캐 부족의 여섯 가지 언어(六蕃语)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한족 관아와 오랑캐 사이에서 중개 무역을 하던 이른바 아랑(牙郎)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나라의 세금(관전)을 떼먹고 도망쳐 해(奚) 부족의 소굴로 기어들어 갔다가, 간교한 꾀를 내어 자신은 당나라 황제의 밀사라 사기를 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훗날 해 부족의 추장들을 꼬드겨 잔치를 벌인 뒤 그들을 모조리 찔러 죽이고 목을 베어 당나라 절도사 장수규(张守圭)에게 바치니, 장수규가 그의 공을 높이 사서 절충(折冲)의 벼슬을 내렸다. 사사명은 안록산과 함께 적을 생포하는 맹장인 착생장(捉生将)이 되어 나가는 전투마다 백발백중 승리를 거두어 마침내 대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사명은 선봉장이 되어 하북의 수많은 고을을 도륙하고 성을 함락하니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일개 쫄개 병사(卒)에서 출발하여 평주자사를 거쳐 하북 땅을 손귀에 쥐고 드높은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니, 안록산의 잔인무도한 위세에 눌려 충성을 바쳤고 죽을 때까지 딴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 뒤 안경서가 안록산을 죽이자, 안경서는 사사명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에게 황제의 성씨인 안(安)씨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안영국(安荣国)이라 고쳤으며 규천왕(妫川王)에 봉했다. 그러나 사사명은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웅거하며 늘 용맹하던 동료 장수 채희덕을 투기하고 두려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경서의 아들 사조의(史朝义)가 채희덕을 찔러 죽이자 사사명은 기뻐 날뛰며 만세를 불렀다.
이윽고 사사명은 정예 기병 800명을 거느리고 하북의 10개 주를 들어 당나라 조정에 다시 귀순하니, 숙종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귀의왕(归义王)이자 범양절도사로 삼았다. 이듬해 건원 원년 무술년에 숙종은 맹장 오승은(乌承恩)을 사사명의 부사로 보내어 은밀히 그의 동태를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사사명은 오승은의 소매 속에서 자신을 찔러 죽이려는 비밀 조서를 발견하고 격노하여 오승은과 그의 심복들을 사정없이 때려 죽이고 다시 반역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당나라 관군이 안경서를 상주성에서 첩첩이 포위하자 사사명은 대군을 이끌고 와서 안경서를 구원했다. 사사명은 처음에 당나라 대군의 용맹함을 몹시 두려워하여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침 대신 소화(萧华)가 위주(魏州)를 들어 당나라 조정에 항복하자 조정에서는 하남절도사 이광원(李光远)을 보내 소화를 대신하게 했다. 사사명은 관군이 교체되어 군심이 흔들리는 틈을 타서 제 아들을 보내 이광원의 진영을 급습했다. 이광원은 전군을 잃고 홀로 몸만 빠져나와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 도망쳤다.
이듬해 건원 2년 정월 초하루, 사사명은 마침내 위주에서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찬칭하고 연호를 순천이라 했다. 이어 군사를 이끌고 상주성을 구원하여 당나라 9개 절도사의 대군을 완전히 대파하여 쫓아 버렸다. 사사명은 안양하 나루터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기어 나온 안경서 형제들을 참혹하게 몰살한 뒤, 그들의 대군을 통째로 흡수하여 유주(계성)로 성대하게 돌아갔다.
사사명은 백관과 번인 추장들을 모아 두고 제 군사적 책략과 대승을 자랑하며, 이는 실로 하늘이 내리신 신비한 지혜(天假智略)라며 뽐내니 어리석은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사사명은 도성에 종묘사직을 건립하고 제 조상들을 황제로 추존했으며, 제 아내 신씨(辛氏)를 황후로 삼고, 둘째 아들 사조흥(史朝兴)을 황태자로 책봉했으며, 맏아들 사조의는 한 단계 낮추어 회왕(怀王)에 봉하고 나머지 아들들을 모조리 대왕으로 삼았다.
이어 안록산의 넋을 부르는 장례를 극진히 치러 주었다. 백관의 직제에 따라 시중과 상서령 등의 높은 벼슬을 두었으나, 정작 실무를 처리하는 부서인 조국 관아(曹局)를 둘 줄 몰라 백관들이 하루 종일 빈 마당에 앉아 서류를 훑어보며 검토하는 시늉만 해대니, 도성의 눈 밝은 선비들이 이를 보고 배를 잡고 조롱했다.
사사명은 제 고향인 범양을 연경(燕京)이라 부르고, 낙양을 주경(周京)이라 칭했으며, 장안을 진경(秦京)이라 불렀다. 대궐의 문 이름을 일화문(日華门)이라 지었고, 백관들이 정사를 품의하는 관아 누각을 청정루(听政楼)라 불렀으며 절도사의 청사를 자시전(紫微殿)이라 이름 지었다. 또한 제 아내 신씨에게 고대 당나라 황실의 예법을 본받아 도성 동쪽 교외에서 누에를 치는 친잠례(亲蚕)를 행하게 했고, 도적 관원들의 아내들을 강제로 명부(命妇)로 삼아 의식을 치르게 했다. 척박하고 거친 유주 땅에서는 예로부터 들어본 적도 없는 화려한 황실 의례가 펼쳐지니, 구경하려는 백성들이 저잣거리를 첩첩이 메워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유주 땅의 무식한 오랑캐 군사들은 평소에 조정의 벼슬 이름이나 품계를 전혀 알지 못했다. 대궐 문 앞에서 황색 깃발을 든 황문시랑(黄门侍郎)의 관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군사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황문(내시) 놈이 어찌 수염이 저토록 거뭇거뭇하게 돋아나 있단 말이냐!”
도적들의 무식함이 온통 이와 같았다.
그해 8월, 사사명은 대군을 이끌고 다시 남하했다. 9월에는 대량(대량현)을 함락하고 마침내 낙양을 점령했다. 사사명은 낙양의 대궐과 절간에 있던 아름다운 불상과 금은보화들을 모조리 털어 제 고향인 유주로 실어 날랐고, 제 옛 사택을 웅장하게 고쳐 지어 용흥사(龙兴寺)라 이름 짓고 금칠을 하여 화려하게 꾸몄다.
사사명은 본래 글자 한 자도 읽을 줄 모르는 일자무식 까막눈이었으나, 제위에 오르자 갑자기 시를 짓는 풍류에 맛을 들였다. 사사명은 시 한 수를 지어 완성할 때마다 몹시 기뻐하며 급히 역참의 파발마를 띄워 전국의 모든 고을에 선포하게 했으니, 시의 수준이 몹시 기괴하여 받아 든 태수들이 배를 잡고 뒹굴며 뒤집어졌다.
일찍이 사사명은 마당의 체리 나무에서 체리가 붉게 익자, 제 맏아들 회왕 사조의와 승상 주지(周贽)에게 체리를 선물로 내리고자 했다. 사사명은 오색 한지(彩笺)를 꺼내어 붓을 쥐고 시 한 수를 적어 좌우에 내렸다.
“체리가 광주리 안에 가득 담겼으니, 절반은 붉고 절반은 노랗구나.
절반은 내 아들 회왕(懷王)에게 주고, 남은 절반은 늙은 재상 주지(周贽)에게 주어라.”
시를 받아 든 서리 용담(龙谭)이 넙죽 엎드려 아뢰었다.
“폐하, 시의 마지막 구절을 ‘절반은 주지에게 주고, 절반은 회왕에게 준다’로 고치시면 시의 운율(声韵)이 딱 맞아떨어져 참으로 명시가 되옵니다.”
사사명이 격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용담의 뺨을 치며 꾸짖었다.
“운율이 도대체 무슨 개뼉다귀 같은 오랑캐 물건이더냐! 내 어찌 아버지가 되어 금쪽같은 내 아들의 이름을 승상 주지 놈의 밑에다 둘 수 있단 말이냐!”
또한, 정원의 석류가 붉게 터지자 사사명은 신이 나서 다시 《석류시(石榴诗)》 한 수를 지어 내렸다.
“삼월 사월에는 온통 붉은 꽃더미 속이더니, 오월 유월이 되니 석류 알갱이가 병(瓶) 속에 가득 찼구나.
날카로운 칼을 쥐고 노란 포대기 옷을 찢어 버리니, 붉은 피를 흘리는 육칠천 명의 어린 남녀들이 쏟아져 나오네.”
석류 알갱이를 붉은 피를 흘리며 쏟아지는 어린아이들에 비유한 이 해괴하고 엽기적인 시를 전국의 태수들이 억지로 베껴 쓰고 관아 문앞 우편 기둥(邮亭)에 걸어두고 외워 대야 했으니 실로 해괴한 풍경이었다.
사사명의 둘째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사조흥은 본래 변방에서 양을 기르던 무식한 오랑캐 목동(牧羊胡雏) 출신이었다. 갑자기 아버지를 잘 만나 하북의 기름진 10개 주를 손아귀에 쥐자, 기고만장해져 법도를 짓밟고 온갖 패악질을 저질렀다. 백성들의 재물을 닥치는 대로 빼앗고 아녀자들을 겁탈하니 백성들이 굶주림과 도탄에 빠져 날마다 눈물로 울부짖으며 관군이 도당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10. 사사명의 비참한 말로와 오랑캐들의 도륙, 그리고 안·사 대란의 최종 종식
상원(上元) 2년 신축년, 당나라 대군이 망산(邙山) 전투에서 도적들에게 참패하여 명장 이광필이 아군을 수습하여 문희로 달아났다. 사사명은 승기를 타서 맏아들 사조의를 선봉장으로 삼고 자신은 몸소 후위 부대를 이끌고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사조의가 영녕군 서쪽에 당도하여 정예 철기군을 거느리고 강자령(姜子岭) 고개를 넘어가다가, 굳건히 매복하고 있던 당나라 관군에게 기습을 당해 대패했다. 사조의는 이후 진격할 때마다 연전연패하여 전군을 완전히 잃었다. 사사명은 머리끝까지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맏아들 사조의와 패전한 장수들을 장막 앞에 꿇려 두고 격노했다.
“네놈들이 내 군령을 가벼이 여겨 대패의 치욕을 안겼으니, 내 장안을 함락하는 날에 네놈들의 목을 가장 먼저 벨 것이다!”
사조의와 장수들은 사시나무 떨듯 하며 목숨을 보존할 길이 없음을 깨닫고 극도의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사사명은 어느 역참에 멈추어 주둔하면서, 제 심복인 조(曹)장군에게 명하여 밤새 딱딱이(刁斗)를 치며 삼엄하게 보초를 서서 제 방을 호위하게 했다.
사조의의 부하 장수였던 낙열(骆悦)과 채문경(蔡文景)이 밀실에서 사조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은밀히 모의했다.
“태자 전하, 아버님이신 황제께서 강자령의 패배를 구실로 장차 전하를 찔러 죽이려 하십니다. 오늘 밤 결단을 내리지 않으시면 우리 장수들은 내일 아침 모두 목이 잘려 구덩이에 처넣어질 것입니다! 황제를 폐위하고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는 역모를 꾸미는 것이 온당합니다. 황제의 호위 대장인 조장군 또한 황제의 포악함에 이를 갈고 있으니 우리와 뜻을 같이하기로 약조했습니다. 조장군을 불러 큰일을 상의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조의가 사색이 되어 손을 저었다.
“부디 성인(사사명)을 놀라시게 하지는 말라. 알아서 조심히 처리하라.”
결국 사조의는 아버지를 시해하는 역모를 묵인하여 허락했다.
장수 낙열 등은 즉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아가, 조장군을 협박하여 황제의 침전 문을 열게 했다. 조장군은 여러 장수가 이미 반역의 칼자루를 쥐었음을 깨닫고 제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막아서지 못했다.
깊은 밤, 낙열이 거느린 수백 명의 철갑 전사들이 칼을 벼리며 황제의 역참 침전으로 들이닥쳤다. 사사명을 지키던 시종들은 조장군마저 길을 열어준 것을 보고 겁에 질려 단 한 명도 무기를 잡지 못했다.
침상에서 깊은 단잠에 빠져 있던 사사명은 갑자기 마당을 뒤흔드는 군사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사사명은 침상 위에 걸터앉아 넋을 잃고 침통해했다.
사사명은 평소에 대궐의 광대와 예인(伶人)들을 몹시 총애하여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을 때도 늘 그들을 침상 곁에 두었었다. 그러나 예인들은 평소 사사명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광대들을 사정없이 때려 죽였기에 늘 황제에게 뼈저린 원한을 품고 있었다.
사사명이 곁에 있던 광대에게 조용히 물었다.
“짐이 방금 꿈을 꾸었는데, 기이하게도 둥근 모래톱 위에 수많은 사슴(鹿) 떼가 노닐고 있어 짐이 그 사슴들을 쫓아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강물 한가운데에 도달하자 사슴들이 모조리 개죽음을 당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고 강물이 순식간에 바짝 마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꿈이 도대체 무슨 징조더냐?”
광대가 사사명의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오더니 옆의 광대들과 남몰래 소리쳤다.
“사슴 록(鹿) 자는 황제의 복록이자 관직인 녹(祿) 자요, 도도히 흐르던 물(水)은 황제의 목숨인 명(命)이로다. 사슴들이 물속에서 다 죽고 물이 바짝 말라 버렸으니, 황제의 녹(祿)과 명(命)이 오늘 밤 동시에 완전히 다했음을 하늘이 예언한 것이로다!”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장수 낙열이 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침전 안으로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낙열이 대도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역적 사사명은 어디에 있느냐!”
곁을 지키던 시종들이 덜덜 떨며 대답하지 못하자, 낙열은 시종 몇 명을 단칼에 찔러 죽였다. 겁에 질린 광대들이 손가락으로 뒷마당의 화장실(如厕)을 가리켰다.
사사명은 정변이 일어났음을 단박에 깨닫고, 뒷창문을 열고 담장을 뛰어넘어 말들이 주둔하던 마구간으로 도망쳤다. 사사명이 안장을 얹은 말에 올라타 도망치려 하자, 추격해 온 낙열의 장수 주자준(周子俊)이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았다. 날아간 화살이 사사명의 한쪽 팔뚝을 관통했고, 사사명은 비명을 지르며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사사명이 흙바닥을 구르며 들이닥친 낙열 등을 쏘아보며 꾸짖었다.
“이 흉악한 반역을 꾀한 괴수가 도대체 누구더냐!”
낙열이 비웃었다.
“회왕(사조의) 전하의 명령이시다!”
사사명이 통곡하며 탄식했다.
“짐이 오늘 아침 입을 잘못 놀려 이 참화를 불러들였구나! 그러나 네놈들이 나를 폐위하는 것이 참으로 너무도 빠르도다! 어찌 며칠만 더 기다려 짐이 장안을 함락하여 천하를 온전히 손귀에 쥔 뒤에 제위를 넘겨받지 못했단 말이냐! 지금 나를 죽여 정변을 일으킨다면 너희들의 대업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사사명은 사조의의 어릴 적 아명(小名)을 세 번이나 목놓아 부르며 울부짖었다.
“조의야! 나를 제발 죽이지는 말아 다오! 이 아비는 제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오직 네놈이 친아비의 목을 벤 천하의 패륜아(杀父之名)가 될까 몹시 두렵구나!”
사사명은 다시 조장군을 매섭게 쏘아보며 저주를 퍼부었다.
“이 은혜도 모르는 호인(胡) 놈아! 짐이 너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참혹한 하극상 역모를 부추겼단 말이냐!”
낙열 등은 군사들을 시켜 사사명의 입을 틀어막고 가죽 끈으로 꽁꽁 묶은 뒤, 유천역(柳泉驿) 역참으로 압송했다. 낙열이 말머리를 돌려 사조의를 대면하자 사조의가 사색이 되어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님(성인)을 설마 놀라시게 하지는 않았느냐?”
낙열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당시 반란군의 핵심 대신이었던 주지와 허숙기(许叔冀)의 대군이 망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사조의는 허숙기의 아들 허계상(许季常)을 급히 보내 주지에게 사태를 보고하게 했다. 군막의 발(帘) 뒤에 앉아 보고를 듣던 재상 주지는 사사명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큰 충격을 받고 의자 아래로 혼절하여 자빠졌다.
사조의가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회군하자, 주지와 허숙기 또한 어쩔 수 없이 대세를 따르기 위해 급히 유천역으로 향했다. 사조의는 재상 주지가 혹시 딴마음을 품어 반역을 꾀할까 두려워하여, 도중에 장수 낙열을 보내 그들을 환영하는 척하다가 유천역 마당에서 주지 등 대신들을 단칼에 베어 죽였다.
사조의는 군사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확실히 다잡기 위해, 사조의의 명의로 거짓 사면령을 꾸며 유천역 감옥에 갇혀 있던 아버님 사사명을 흰 비단 줄로 목을 매어 살해했다. 그리고 사사명의 시신을 두터운 펠트 천(氈)으로 둘둘 말아 낙타 등에 싣고 낙양성으로 보내 버렸다. 사조의는 낙양에 입성하여 거짓 제위에 올랐고 연호를 현성(显圣)이라 했다.
사조의는 사사명의 서자(孽子)이자 얼자였다. 아버지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사조의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장수 장통유에게 명하여 유주성 안에 있던 제 동생 사조흥 등을 모조리 체포하여 참살했다. 그리고 장통유를 연경(유주) 유수 장수로 삼았으나, 장통유 또한 유주성의 장수 고국인(高鞠仁)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또한 사조의는 오랑캐 출신의 장수인 아시나승경을 의심하여 해치려 하니, 아시나승경은 군사들을 이끌고 로현(潞县) 땅으로 달아났다. 장수 고국인은 유주성 안에 호령을 내려 격문을 띄웠다.
“도성 안의 모든 오랑캐 호인(胡人)들을 잡아 죽여라! 역적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성대한 상을 내릴 것이다!”
이에 성안의 무식한 백성과 군사들이 눈이 뒤집혀 칼을 쥐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오랑캐 갈호(羯胡)들의 무리를 닥치는 대로 참수하고 도륙했다. 심지어 젖비린내 나는 호인들의 어린아이를 공중으로 집어던진 뒤 시퍼렇게 날 선 창끝으로 받아내어 꿰어 죽이는 끔찍한 만행을 일삼았다. 도성의 백성들 중 콧대가 유독 높고 깊은 눈을 가졌거나 수염이 덥수룩하여 오랑캐 호인과 생김새가 비슷한 한족 백성들마저 억울하게 호인으로 몰려 목이 잘려 죽은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고국인은 스스로 연경병마사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5월에 사조의는 거짓 태상경이었던 이회선(李怀仙)을 어사대부이자 범양절도사로 삼았고, 이회선은 유주성에 부임하자마자 군사를 일으켜 잔인하던 고국인을 대뜸 찔러 죽였다. 유주의 관아 문앞에서는 그해 봄부터 여름에 이르기까지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장수들이 서로를 찔러 죽인 정변이 무려 대여섯 차례에 달했다. 사조의는 이회선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에게 병부상서와 무도군왕(武都郡王)의 높은 벼슬을 내렸다.
보응(宝应) 원년(762년), 이회선은 사사명의 시신을 유주성 양향현(良乡) 북쪽 언덕에 대대적으로 매장해 주었다. 이달에 당나라 조정의 관군이 마침내 동도(낙양)를 완전히 복구하고 태극기를 내걸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 대패한 사조의는 황하를 건너 위주성으로 도망쳤다. 하북의 모든 주현들이 당나라 관군의 위세 앞에 추풍낙엽처럼 귀순하여 성문을 열었다. 사조의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이회선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그에게 시중(侍中)의 벼슬을 더해주었다. 사조의가 마침내 막다른 골목인 막주(莫州) 땅에 당도했으나, 유주의 이회선이 딴마음을 품었을까 두려워하여 차마 유주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북쪽 산길을 따라 도망쳐 해(奚) 부족의 소굴로 망명하려 했다.
12월에 마침내 대세를 깨달은 범양절도사 이회선이 당나라 조정에 항복을 선언하고 관군을 이끌고 나섰다. 이회선은 도망치던 사조의를 유주성 동쪽 벌판에서 포위하여 기습 공격했다. 사조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여 그 파란만장하고 흉악한 생을 마감했다. 이회선은 사조의의 목을 뎅강 베어 목함(函)에 담은 뒤, 기병 장수 서제(徐济)에게 주어 장안의 대궐 아래에 바치게 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대대적으로 환호하며 이회선의 충성을 가차 없이 치하했고, 그에게 태부(太傅), 시중 겸 병부상서의 높은 명예직을 내리고 무도군왕으로 삼아 평생 유주(幽州)절도사의 권세를 누리게 하니, 마침내 삭풍이 몰아치던 계문(蓟门) 땅에 반란의 횃불이 꺼지고 기나긴 평화가 당도했다.
사사명은 건원 2년 기해년 3월에 안경서를 죽이고 제위를 참칭했다가, 그의 아들 사조의가 보응 원년 12월에 이회선에게 참살당해 제 머리가 쪼개어 대궐에 바쳐지기까지, 사사명 부자가 미쳐 날뛰며 제위를 도둑질한 세월이 앞뒤로 겨우 4년(首尾四年)이었다.
안록산과 사사명이라는 두 명의 흉악하고 간사한 변방 오랑캐 갈호(二凶羯)들이 상계하여 변방의 범양 땅을 들어 나라의 반역을 꾀했다. 안록산이 천보 14년 을미년 11월에 반란의 봉화를 올려 당나라를 짓밟은 이래, 사사명의 맏아들 사조의가 보응 원년 임인년 12월에 이회선에게 참살당해 머리가 베이기까지, 두 오랑캐 역적놈이 중원의 금수강산을 찢어발기고 짓밟아 백성들을 도륙한 기나긴 난세가 무려 8년(凡八年) 세월이었으니, 마침내 유주와 연조 땅이 평정되자 비로소 천하의 백성들이 두 다리를 뻗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주요 한자 · 고사성어 풀이
- 耆老缁黄 (기로치황) — 나이 많은 덕망 있는 노인(耆老)과 승려 및 도사(缁黄, 승려의 검은 옷과 도사의 황색 옷)를 아우르는 말. 안록산이 낙양에서 황제를 참칭할 때 강제로 동원되어 제위에 오를 것을 청하는 권진(劝进) 의식을 치렀다.
- 三司谳刑 (삼사언형) — 당나라 최고 합동 사법 재판 제도. 형부(刑部), 어사대(御史台), 대리시(大理寺)의 세 사법 기관이 함께 국가 중죄인의 형벌을 심리하고 최종 판결을 내리는 엄숙한 절차이다.
- 撒星陣 (살성진) — 하늘에 흩어진 별들의 모양처럼 군사들을 조밀하지 않게 깃발 하나에 15명씩 듬성듬성 배치하는 기만 진법. 적군에게 병력이 적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방심을 유도한 뒤, 천둥벼락처럼 기습하는 전술이다.
- 凝碧池 (응벽지) — 당나라 장안의 황실 금원(禁苑)에 있던 아름다운 연못. 안록산 무리들이 황실 음악가들을 모아놓고 억지로 잔치를 벌였을 때, 악사 뇌해청이 슬피 울며 악기를 던졌다가 참혹하게 사지가 찢겨 죽은 비극의 역사적 현장이다.
- 步搖 (보요) — 걸을 때마다 펜던트 장식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여성들의 화려한 머리핀 장식. 본래 한족의 전통 장신구였으나 천보 연간에 사치스러운 오랑캐 복장(胡服)과 함께 크게 유행하여 나라가 망할 징조로 여겨졌다.
- 首尾四年 (수미사년) — 머리부터 꼬리까지 앞뒤로 합쳐 4년이라는 뜻.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이고 제위를 차지한 건원 2년(759년)부터 사조의가 몰락해 참살당한 보응 원년(762년)까지의 4년 동안의 짧고 허망했던 집권 세월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