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망론(坐忘論)

📚 좌망론(坐忘论) · 제1편

좌망론(坐忘論)


서론 (Introduction)

사람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생명이고, 생명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道)이다. 사람이 도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 마른 수레바퀴 자국 속의 물고기도 여전히 한 바가지의 물을 바라며 살고자 애쓰는데, 쇠락하고 타락한 풍조에 젖은 세상 사람들은 정(情)도 없이 도를 거스르며 살아간다. 생사의 괴로움은 싫어하면서도 스스로 생사의 업장을 즐겨 쌓으며, 도덕(道德)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은 중히 여기면서도 실제로 도덕을 실천하는 행실은 가볍게 여긴다. 마음의 본말이 이처럼 뒤바뀌어 있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곤궁해진 뒤에야 비로소 소통하기를 생각하고, 미혹된 뒤에야 비로소 올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생각하지만, 흘러가는 일촌의 시간은 둥근 옥보다 귀한 것이니 뒤늦은 뉘우침과 한탄이 깊어질 뿐이다. 이에 삼가 경전의 깊은 뜻을 받들고 마음을 다스리는 심법(心法)에 서로 부합하는 핵심을 골라, 도를 닦는 단계적 순서로 삼고자 대략 일곱 가지 조항(七條)으로 정리하고 추익(樞翼, 명상의 핵심 추축)을 덧붙인다.

제1단계: 경신 (敬信一 – 공경과 믿음)

대저 믿음(信)이란 도(道)의 뿌리이며, 공경함(敬)이란 덕(德)의 줄기이다. 뿌리가 깊어야 도가 오랫동안 자랄 수 있고, 줄기가 굳건해야 덕이 울창하게 우거질 수 있다. 그러나 천하에 빛나는 온 성(城)과 맞바꿀 만큼 진귀한 옥이라도 변화(卞和)가 바쳤을 때는 두 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는 충직한 간언이라도 오자서(伍子胥)가 아뢰었을 때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사물และ 형체는 뚜렷하지만 마음의 갈래는 미혹되기 쉽고, 일의 이치는 싹트지만 감정과 생각은 소홀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극한 도(至道)는 빛깔과 맛의 감각을 초월해 있고, 참된 본성(真性)은 탐욕의 대상과 격리되어 있으니, 어찌 그 미묘하고 고요한 소리를 듣고 깊은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형상 없는 존재를 마주하고도 의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사람이 스스로의 번뇌를 잊는 ‘좌망(坐忘)’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이 도를 닦는 핵심 비결임을 믿어 공경하고 앙모하며 존중하여 마음에 결정코 의심이 없다면, 거기에 더해 부지런히 실천함으로써 마침내 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莊子)》에서 말하기를 “육체를 잊어버리고 총명을 내쫓으며, 형체에서 벗어나고 지혜를 버려 대도(大通)와 하나가 되는 것, 이를 일컬어 좌망(坐忘)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대저 좌망이란 무엇인들 잊지 않겠는가! 안으로는 제 한 몸을 지각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우주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여, 도(道)와 더불어 아득히 하나가 되니 온갖 염려와 생각이 다 사라지는 것이다. 《장자》에서 “대도와 하나가 된다”라고 한 것은 말은 쉬우나 뜻은 지극히 깊은 것이다. 미혹된 자들은 이를 듣고도 믿지 않은 채, 보물을 가슴에 품고서 또 다른 보물을 찾아 헤매니 어찌할 것인가! 경전에서 말하기를 “믿음이 부족하면 불신이 따르게 된다”라고 한 것은, 도를 믿는 마음이 부족하면 불신의 화가 미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고서야 어찌 도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

제2단계: 단연 (斷緣二 – 인연을 끊음)

인연을 끊는다는 것(斷緣)은 작위가 있는 속세의 온갖 복잡한 일과의 인연을 끊는 것을 말한다. 세상일을 내려놓으면 육체가 피로하지 않고, 억지로 행함이 없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이르면 마음이 스스로 편안해진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하며 생활이 검박해지는 념간(恬簡)에 날마다 가까워지고, 티끌 같은 번뇌와 얽매임이 날로 엷어지면, 발자취는 속세에서 더욱 멀어지고 마음은 도에 더욱 가까워진다. 지극히 거룩하고 신령한 존재들이 어찌 이러한 과정에서 비롯되지 않았겠는가!

경전에서 말하기를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평생토록 수고롭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간혹 제 덕망을 드러내거나 능력을 뽐내며 남에게 잘 보여 자신을 보존하려 하거나, 선물을 주고받으며 경조사를 챙기며 바쁘게 오가기도 하고, 은둔하는 척 가장하여 은근히 명예와 지위의 상승을 바라기도 하며, 술과 밥으로 남을 대접하고 불러들여 훗날의 은혜를 기대하기도 한다. 이는 모두 마음속에 교활한 잔머리를 묻어두고 세상의 이익을 구하는 짓이니, 도를 따르는 삶이 아닐 뿐만 아니라 참된 수행을 크게 방해하는 악습이다.

이와 같은 온갖 속세의 일들은 마땅히 모두 끊어내야 한다. 경전에서도 “그 구멍을 열고 그 세상일을 돕는다면 평생토록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먼저 소리 내어 부르지 않으면 상대방도 스스로 호응하지 않을 것이며, 상대가 비록 나를 부르더라도 내가 호응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처럼 오래된 번뇌의 인연을 서서히 끊어내고 새로운 집착의 인연을 맺지 않는다면, 겉만 번지르르한 교제와 기세의 결합은 자연히 날마다 소원해질 것이며, 아무런 장애가 없이 안한하고 여유로운 뒤에야 비로소 도를 닦을 수. 《장자》에서 “보내지도 않고 마중하지도 않는다”라고 한 것은 무위로써 세속의 감정을 사귀는 태도를 뜻한다. 또 이르기를 “잔머리의 창고가 되지 말고, 세상일의 책임자가 되지 말며, 얕은 지식의 주인이 되지 말라”고 하였다. 만약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일이 있어 부득이하게 처리해야 한다면 마음속에 애착이나 집착의 마음을 남겨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3단계: 수심 (收心三 – 마음을 거둠)

대저 마음(心)이란 한 몸의 주인이요 온갖 영묘한 신령(百神)의 장수이다. 고요하면 지혜(慧)가 생겨나고, 흔들리면 미혹하여 어두워진다. 번뇌와 미혹의 환상 속에 빠져 살면서 그것만을 오직 실재라고 우기며, 작위가 있는 유위(有爲)의 세상 속에서 달콤하게 노닐면서 텅 빈 실상을 누가 깨닫겠는가! 마음과 인식이 이처럼 뒤바뀌어 미쳐버리는 것은 진실로 제 마음을 기탁하는 터전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웃을 선택하여 거처를 정해도 행실이 달라지고 좋은 친구를 가려 사귀어도 큰 이익을 얻는데, 하물며 육체는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마음은 지극한 도 가운데 머물고자 하면서 어찌 속세의 어지러운 경계를 버리지 않고 지극한 안정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최초의 단계에서는 반드시 단정히 앉아 마음을 거두고(安坐收心), 세상의 모든 어지러운 경계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에 머물어야 한다. 무소유에 머물러 아무런 한 물건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면 자연히 텅 빈 허무(虛無)의 세계로 들어가 마음이 비로소 도와 하나가 된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지극한 도의 경지는 고요하여 아무것도 없으나, 신령스러운 작용은 한량이 없으며 마음의 본체 또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본래 마음의 본체는 도(道)를 근본으로 삼고 있으나, 다만 마음의 신령함이 번뇌에 오염되고 덮여 가려짐이 깊어지며 방황한 지가 오래되어 마침내 도로부터 소외되었을 뿐이다. 만약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어내어 신령한 앎의 근본을 활짝 여는 것을 ‘수도(修道)’라 한다. 다시는 헤매지 않고 도와 그윽하게 합일되어 도 가운데 편안히 안주하는 것을 ‘귀근(歸根, 뿌리로 돌아감)’이라 하고, 뿌리를 굳건히 지켜 떠나지 않는 상태를 ‘정정(靜定, 고요한 안정)’이라 한다.

정정에 머문 지가 오래되면 마음의 병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회복되며, 생명이 이어져 비로소 참된 상도(常道)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깨달으면 밝아지지 않음이 없고, 상도를 지키면 영원히 소멸하지 않으니, 나고 죽는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실체는 참으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대도(大道)를 본받아 마음을 편안하게 할 때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비움(無所著)을 귀하게 여긴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만물이 울창하게 자라나지만 저마다 자기 뿌리로 돌아가니, 뿌리로 돌아함을 고요함(靜)이라 하고 고요함을 생명의 회복(復命)이라 하며, 생명의 회복을 영원함(常)이라 하고 영원함을 깨닫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고 하였다.

만약 억지로 마음을 잡아 텅 빈 공(空)에 묶어둔다면 그것은 여전히 마음을 특정한 곳에 매어두는 것(有所)이지 참된 비움(無所)이 아니다. 마음이 어딘가에 걸려 있게 되면 마음은 도리어 피로해지며 이치에도 맞지 않고 오히려 병이 될 뿐이다.

오직 마음이 사물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참된 안정(真定)의 올바른 기초이다. 이로써 참된 안정을 삼으면 마음의 기운이 조화롭고 시간이 흐를수록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볍고 상쾌해지니, 이러한 징후로써 수행의 참과 거짓을 스스로 알 수 있다.

만약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지각을 옳고 그름을 묻지도 않고 완전히 멸해버린다면, 이는 감각과 지혜를 영원히 차단하여 소경과 같은 장목(盲)의 안정에 빠질 뿐이다. 반대로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두어 아무런 단속이나 조절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본래의 평범한 세속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선악만 억지로 끊어내어 마음이 가리키는 지향점이 없이 마음대로 떠돌게 놔두고 저절로 안정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린다면 헛되이 제 삶을 그르칠 뿐이다. 세상 온갖 일을 다 겪고 행하면서도 마음에 오염됨이 없다고 큰소리치는 자들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나 실천은 극히 거짓된 것이다. 참된 배움을 구하는 무리들은 특히 이를 경계해야 한다.

지금 가르치는 핵심은 어지러운 번뇌를 쉬게 하면서도 마음의 밝은 비춤(照)을 멸하지 않고, 고요함을 지키되 텅 빈 공(空)에 집착하지 않아 늘 변함없이 행함으로써 자연히 참된 지혜와 견해를 얻도록 하는 데 있다. 만약 일상생활이나 가르침의 핵심에 의심나는 점이 있다면 잠시 생각을 굴려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하고 의심을 풀어내니, 이것 또한 참된 지혜가 생겨나는 올바른 뿌리이다.

깨닫고 나면 곧바로 생각을 멈추어야 하며 절대로 깊은 사색을 길게 이어가서는 안 된다. 사색이 깊어지면 지혜가 고요함의 성품을 해치게 되어 근본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비록 한때의 뛰어난 재주를 뽐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침내 영원한 대업을 훼손하게 된다.

만약 어지럽고 사특한 잡념이 일어나거든 자각하는 즉시 없애야 하며, 칭찬이나 비방의 명예, 선악의 모든 일들을 듣게 되더라도 즉시 털어버리고 마음에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 받아들이면 마음이 번뇌로 가득 차게 되고, 마음이 가득 차면 도가 머무를 자리가 없어진다.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마치 보고 듣지 않은 것처럼 하여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마음에 아예 스며들지 않게 해야 한다.

마음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를 ‘허심(虛心, 비운 마음)’이라 하고, 마음이 밖으로 쫓아 나가지 않는 상태를 ‘안심(安心, 가라앉은 마음)’이라 하니, 마음이 가라앉아 텅 비게 되면 도가 스스로 찾아와 머물게 된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사람이 마음을 비워 억지로 행함이 없는 무위(無爲)에 도달하면 도를 애써 구하지 않아도 도가 스스로 귀의한다”고 하였다.

마음속에 아무런 집착이 없고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에도 억지 부림이 없다면, 다투지도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으므로 칭찬과 비방이 일어날 틈이 없으며, 잘난 체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으므로 이익과 해로움이 마음을 뒤흔들 수 없다.

참으로 중도(中道)를 따르는 것을 상도(常)로 삼고,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처신하니, 구차하게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만약 때도 아니고 적절한 일도 아님에도 억지로 생각을 짜내어 행하면서 스스로 집착이 없다고 우긴다면 끝내 참된 배움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마음의 법은 눈동자와 같아서 아주 미세한 먼지 하나만 들어가도 눈이 불편하듯이, 사소한 세상일이 마음에 걸려 있게 되면 마음은 반드시 동요하고 어지러워진다. 마음에 동요하는 병이 생기면 안정의 문에 들어가기 어렵다.

그러므로 도를 닦는 요체는 급선무로 마음의 병을 제거하는 데 있다. 병이 굳건히 제거되지 않으면 끝내 고요함을 얻기 어렵다. 마치 비옥한 밭이라도 가시나무와 잡초를 뽑아내지 않으면 비록 좋은 씨앗을 뿌릴지라도 이로운 곡식 싹이 무성하게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음의 애착과 사견, 무수한 생각들은 바로 마음의 가시나무와 같으니, 만약 이를 깎아내고 베어버리지 않으면 고요한 안정(定)과 밝은 지혜(慧)가 생겨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몸이 부귀한 지위에 있거나 배움이 깊어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여 말은 자비롭고 검소하게 하면서도 행동은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제 잘못을 꾸미는 변명은 청산유수 같고 권세로써 남을 위협하는 데는 능하면서도 이득은 자기 공으로 돌리고 허물은 남에게 탓하니, 이 병이 가장 깊어서 비록 도를 배운다 한들 아무런 이익이 없다. 이는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는 아집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음은 오랫동안 외부 경계에 의존해 살아왔기에 혼자 자립하는 데 길들지 않아, 갑자기 의지할 곳이 없어지면 스스로 편안하기 어렵고 잠시 편안함을 얻더라도 도리어 흩어지고 흩어져 흐트러지기 쉽다. 번뇌가 일어나는 족족 단속하여 흔들리지 않게 만들기를 오랫동안 길들이면 스스로 안온하고 한가해진다. 낮이나 밤이나 걷고 서고 앉고 누울 때나 세상일을 처리할 때를 막론하고 언제나 늘 의식적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야 한다.

만일 마음이 안정을 얻었다면 마땅히 마음을 편안하게 기르고 영양을 공급해야 하며 마음을 건드리거나 번거롭게 해선 안 된다. 좁은 안정을 조금만 얻어도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으며 점차 마음을 길들여 길들이면 오직 맑고 아득한 도의 세계가 널리 깊어질 것이다. 평생 사랑하고 아끼던 세속의 것들이 이미 누추하고 보잘것없게 느껴질 것인데 하물며 안정을 통해 밝은 지혜를 얻어 참됨과 거짓됨의 실상을 깊이 꿰뚫어 보았을 때는 오죽하겠는가!

대저 소와 말은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지만 방종하게 놓아두고 단속하지 않으면 도리어 거칠어지고 마부의 멍에를 거부한다. 매와 독수리는 들판의 거친 새들이지만 사람이 끈으로 묶어 단속하며 종일 손 위에 올려두고 기르면 자연히 길들고 온순해진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 마음대로 방종하게 노닐도록 놓아두고 거두지 않는다면 거칠고 산란함만 더할 뿐이니 어찌 도의 깊고 오묘한 실상을 관찰할 수 있겠는가! 경전에서 이르기를 “비록 커다란 둥근 옥을 바치고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수레를 앞세울지라도, 단정히 앉아서 이 도에 나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제4단계: 간사 (簡事四 – 세상일을 단순화함)

대저 사람의 생명이란 반드시 세상일과 사물을 겪게 마련이지만, 세상일이란 만 가지나 되어 한 사람에게만 온전히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숲속에 둥지를 튼 새는 겨우 나뭇가지 하나만 필요할 뿐이니 온 숲의 나뭇가지를 새삼 탐내지 않으며, 강물을 마시는 짐승은 배가 가득 차면 그만이니 도도하게 흐르는 넓은 파도를 다 들이켜려 욕심내지 않는다.

밖으로는 만물의 실상을 탐구하고 안으로는 제 본성을 밝혀 제 삶에 각자 한계와 분수(分)가 있음을 안다면, 분수 밖에 있는 쓸데없는 일을 애써 구하려 하지 않는다. 처리해야 할 정당한 일만 알아서 행하고 자기에게 마땅치 않은 부당한 일은 맡지 않는다.

자기에게 부당한 일까지 억지로 도맡게 되면 지혜와 정신이 손상되고, 제 분수에 넘치는 일을 억지로 도모하면 육체와 신령이 망가진다. 몸 자체도 편안하게 보존하지 못하면서 어찌 대도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도를 닦는 사람은 세상일을 끊어내고 극히 단순화하여 고요함의 요체를 파악하고, 일의 무겁고 가벼움을 헤아려 취하고 버릴 바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중요하지 않고 가볍고 하찮은 일들은 모두 마땅히 끊어내야 한다.

마치 사람이 좋은 술과 고기를 먹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으며 명예와 높은 지위를 지니고 황금과 옥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이는 모두 욕망이 빚어낸 군더더기일 뿐이며 삶을 보존하는 유익한 약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를 쫓아가다가 스스로 파멸과 죽음에 이르니, 고요히 생각해보면 이 미혹됨이 얼마나 극심한가!

《장자》에서 이르기를 “삶의 참된 실상에 통달한 사람은 생명에 도저히 쓸모없는 짓은 억지로 도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생명에 쓸모없는 일들이란 분수 바깥의 헛된 사물과 재물이다. 거친 나물밥과 낡고 헐어빠진 옷이라도 족히 사람의 성품과 목숨을 기를 수 있으니, 어찌 술과 고기, 화려한 비단을 기다린 뒤에야 삶이 온전해지겠는가!

그러므로 살아가는 데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아낌없이 제거해야 한다. 생명을 유지하는 용도보다 넘쳐나는 잉여의 재물 또한 마땅히 버려야 한다. 재물에는 해로운 기운(害氣)이 묻어 있어 쌓아두면 마침내 사람을 상하게 하니, 비록 적게 소유하더라도 그것이 번뇌의 무거운 짐이 되거늘 하물며 많을 때야 오죽하겠는가!

진귀한 수나라의 보물 구슬(隋珠)을 쏘아 천 길 절벽 위에 앉아 있는 참새를 잡으려 한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하물며 고결한 도덕을 저버리고 고귀한 성품과 목숨을 소홀히 한 채 쓸데없는 헛된 이익을 쫓아 스스로 생명을 갉아먹고 파멸시키는 짓은 얼마나 더 어리석은가!

명예와 높은 지위를 신령한 도덕에 견주어보면 명예와 지위는 가짜이고 미천한 것이지만 도덕은 참되고 존귀한 것이다. 귀하고 천함의 차이를 분명히 안다면 마땅히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하니, 헛된 이름 때문에 몸을 상하게 하지 말고 일시적인 지위 때문에 숭고한 뜻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장자》에서 “이름을 날리려다 제 참된 자아를 잃어버리는 자는 훌륭한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서승경(西升經)》에서도 이르기를 “참된 기운을 안고 통일된 하나를 굳건히 지키면 능히 신선이 되어 세상을 건너가리라. 그대가 지키지 못하는 것은 오직 영화로운 관직의 자리에 연연해 앉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사소한 일들을 가려내고 단순화하지 못해 마주치는 일마다 다 관여하게 된다면 마음이 지치고 지혜가 미혹되어 마침내 도를 닦을 시간이 없어진다. 만일 일 처리가 물 흐르듯 가볍고 편안하여 세상 온갖 사물에 얽매임이 없는 자라면 그 사람은 이미 도를 증명하고 완성한 도인이다. 그러나 실제로 성취가 없으면서도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은 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일 뿐이다!

제5단계: 진관 (真觀五 – 올바른 관찰)

대저 진관(真觀)이란 지혜로운 사람의 앞선 거울이며 능력이 출중한 자의 날카로운 관찰이다. 우연히 닥쳐오는 화와 복의 실상을 깊이 연구하고 고요함과 흔들림의 길흉을 상세히 분석하여, 일의 조짐이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 미리 앞서 알아차려 적절하게 대처하고 제 몸과 생명을 지극히 보존하는 지혜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런 어지러운 뒤탈을 남기지 않고 행동하며 이치가 이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참된 진관이라 한다.

그러나 일상의 한 끼 식사와 잠 한 번 자는 것도 모두 생명의 덜어냄과 보탬의 원천이 되며, 한 가지 행동과 말 한마디 또한 마침내 재앙과 복의 뿌리가 될 수 있다. 비록 잔머리로 말단을 교묘하게 억제하려 드는 것보다는 미련할지라도 그 근본을 미리 단속하고 경계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근본을 잘 관찰하여 말단의 조짐을 꿰뚫어 보는 것이야말로 조급하게 세상과 다투지 않는 담박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거두고 세상일을 단순화하여 날마다 작위가 있는 일들을 덜어내어(日損有爲), 몸을 정숙하게 가라앉히고 마음을 한가롭게 해야만 비로소 도의 깊고 오묘한 실상(妙)을 올바르게 관찰할 수 있다. 도덕경에서 “늘 욕심이 없는 무위(無)의 상태에서 도의 깊고 오묘한 실상을 관찰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도를 닦는 유한한 육신이라도 반드시 의복과 음식의 공급에 의존해야 하니 버릴 수 없는 세상일도 있고 쓸모 있는 사물도 있으므로, 마땅히 마음을 텅 비우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되 밝은 눈으로 당당하게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 방해물이 된다고 지레 짐작하여 마음에 번뇌와 조바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만약 마주하는 사소한 일 때문에 짜증을 낸다면 이미 마음의 병이 재발하여 움직인 것이니 어찌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혔다 말할 수 있겠는가!

대저 사람이 먹고 입는 세상일들은 나를 실어 나르는 작은 배(船舫)와 같다. 깊고 넓은 바다를 건너고자 할 때는 오직 배의 도움을 빌려야 하니, 바다를 다 건너고 나면 배는 미련 없이 버려두는 것이 이치이다. 그런데 아직 바다를 채 건너기도 전에 어찌 배부터 먼저 버리고자 하는가!

의복과 음식이 환영 같고 덧없는 것임은 참으로 영위할 가치가 없지만, 우리가 마침내 텅 빈 환영의 세계를 초월하기 위해 잠시 임시방편으로 의복과 음식을 구하는 것뿐이다. 비록 구하고 생활하는 일에 종사할지라도 마음속에 얻고 잃음의 득실과 애착을 낳지 말아야 한다.

일이 있거나 없거나 마음은 항상 편안하고 태평하며 남들과 똑같이 구하되 욕심을 내어 탐하지 않고, 남들과 똑같이 얻되 쌓아두고 모으지 말아야 한다. 탐하지 않으므로 마음의 걱정이 없고 쌓아두지 않으므로 잃어버리는 슬픔도 없다. 발자취는 항상 남들과 평범하게 섞여 살지만 마음은 언제나 저 세속의 물결과 다른 곳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참된 실천의 으뜸가는 비결이니 힘써 실천해야 할 것이다.

비록 앞서 인연을 끊고 단순화하였더라도 마음의 깊은 질병 중에는 쉽게 제거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오직 올바른 지혜의 법으로써 관찰해야 한다.

만약 색욕의 병(色病)이 유독 깊은 자라면 마땅히 고운 육체의 유혹이 모두 제 뇌리에서 일으킨 생각과 망상(想)의 결과물일 뿐임을 관찰해야 한다. 애당초 어리석은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끝내 음욕의 유혹도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유혹의 색상은 본래 텅 빈 허상이요, 밖의 유혹에 이끌리는 마음 또한 내면의 망상임을 알아야 하니, 망상과 텅 빈 아집이 사라진다면 누가 유혹의 주인이 되겠는가! 경전에서 “색욕이란 오직 망상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망상이 다 텅 비었는데 어찌 색욕이 달라붙겠는가!

또한 요염하고 아름다운 고운 자태를 생각하는 것은 저 들판의 여우 홀림(狐魅)보다 심하다. 여우 홀림은 사람을 유혹하지만 마침내 징그럽고 싫증을 느끼게 하므로 비록 몸은 죽을지언정 나쁜 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으니, 싫어하고 기피하는 마음 덕분에 사특한 음란함을 영원히 멀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미혹하여 마음 깊이 애착하고 매달리게 하니, 죽음에 이르러도 연민과 미련이 깊어져 마침내 사특한 잡념 때문에 죽은 뒤 온갖 나쁜 지옥 속에 떨어지게 만든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금생에 잘못된 정욕의 마음을 내어 부부가 된 자들은 죽은 뒤에 함께 인도(인간 세상)에 태어나기 어렵다”고 하였다. 왜 그러한가? 오직 사특하고 어두운 집착의 생각 때문이다.

또한 고운 육체가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라면 어찌하여 물고기는 미인을 보고 깊은 물속으로 숨어버리고 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겠는가! 신선들이 바라볼 때는 더럽고 부정한 오물이며 현명한 성현들은 생명을 갉아먹는 날카로운 도끼와 칼날에 비유하였다. 한 평생 살아가는 목숨에서 겨우 이레 동안만 밥을 먹지 않아도 굶어 죽지만 한 백년 동안 여인을 멀리하고 살아가더라도 건강하고 수명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고운 육체의 유혹은 몸과 마음의 진짜 에센스가 아닐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성품과 생명을 빼앗아가는 살수이자 도둑(仇賊)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니, 어찌 마음을 얽매어 스스로를 파괴하고 소멸하겠는가!

만일 다른 이의 악행을 보고 마음에 깊은 혐오감과 미움을 내는 자는, 마치 다른 이가 자살하는 것을 보고 제 목을 길게 빼어 남의 칼날을 제 몸으로 끌어당겨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짓과 똑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남이 스스로 악을 저지르는 것을 내가 제지하지 못했거늘, 내가 도대체 왜 남의 악행을 내 마음속으로 주워 담아 제 마음에 무거운 병을 만드는가!

또한 악을 행하는 자가 미워해야 마땅하다면 선을 억지로 행하는 자 또한 마땅히 미워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선악에 얽매이는 모든 집착이 똑같이 도(道)를 닦는 데 커다란 장애물(障道)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가난과 빈곤의 곤궁함이 닥쳐오거든 가만히 관찰해보아라. 도대체 누가 나를 가난하게 만들었는가? 천지는 만물에 평등하여 덮어주고 실어 줌에 사사로운 감정이 없으니 내가 지금 겪는 빈곤은 하늘과 땅의 탓이 아니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기르며 누구나 부귀하게 살기를 바라니 내가 지금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부모의 탓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온갖 귀신들도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바빠 나에게 가난을 선물할 여유나 능력이 없다.

앞뒤로 철저히 분석하고 찾아보아도 가난이 찾아온 시초의 근원을 알 수 없으니, 마침내 이것이 내가 지은 과거의 업장(自業)이요 하늘이 내린 천명(天命)임을 깨닫게 된다. 업은 내가 지은 것이요 목숨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업과 천명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쫓고 메아리가 소리를 따르는 것과 같다.

도망칠 수도 없고 원망할 수도 없으니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깨달아, 하늘의 이치를 즐기고 제 천명을 깨달으므로 마음에 한 점 걱정이 없다. 그러니 가난이 어찌 고통이 될 수 있겠는가!

《장자》에서 “업이 들어와 스스로 버릴 수 없는 것을 자업(自業)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가난과 질병이 들어왔을 때는 억지로 밀쳐낼 수 없다. 경전에서도 “하늘과 땅도 그 굳건한 조화를 바꿀 수 없고 음양도 그 정해진 업장을 쉽게 돌이킬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써 살펴보면 그것이 참된 운명(真命)이며 외부 사물의 탓이 아니니 어찌 원망할 바가 있겠는가!

마치 용맹스러운 전사가 흉악한 도적 떼를 마주하고도 두려운 마음이 없이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며 전진하면 잡도적 떼가 모두 흩어지고, 큰 공훈을 세워 한평생 부귀영화와 녹봉을 누리는 것과 같다.

지금 나의 몸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가난과 질병은 바로 도적 떼요, 나의 굳건한 올바른 마음(正心)은 용맹한 전사이며, 지혜로운 성찰로 관찰하는 것은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요, 번뇌와 얽매임을 말끔히 씻어내는 것은 승리하는 것이며, 고요하고 맑게 항상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영화로운 영예와 녹봉이다.

만약 온갖 hardships가 다가왔을 때 내 마음이 이와 같은 올바른 관찰을 세우지 못한 채 시름시름 걱정하고 얽매인다면, 그것은 마치 군사가 도적을 만나 공을 세우기는커녕 갑옷과 방패를 내팽개치고 군대를 배반해 도망치다가 죄를 얻고 행복을 떠나 고통으로 들어가는 짓과 같으니 어찌 애처롭지 않겠는가!

만약 병마의 고통이 찾아오거든 마땅히 이 질병이 나에게 물리적 몸뚱이(我身)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관찰해야 한다. 만약 나에게 몸뚱이가 없다면 질병이 도대체 어디에 둥지를 틀고 기탁하겠는가! 경전에서 “나에게 만약 몸뚱이가 없다면 나에게 무슨 근심걱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그 고통을 느끼는 마음을 관찰해 보아라. 마음속에도 고통을 주재하는 참된 실체(真宰)가 존재하지 않으니, 안팎으로 아무리 찾아보아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실체가 없다.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계산하고 매달리는 생각들은 오직 어리석은 망상하는 마음(妄心)에서 일어난 허상일 뿐이다. 이처럼 육체를 고목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불 꺼진 재처럼 텅 비우면(枯形灰心) 마침내 만 가지 질병이 일시에 다 소멸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만약 죽음을 끔찍하게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자라면 마땅히 나의 육신이란 신령스러운 정신이 잠시 머무는 집(舍)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몸이 이제 늙고 병들어 기운이 쇠약해진 것은 마치 오래되어 썩고 부서진 낡은 집과 같아 더는 편안히 머물 수 없으니, 스스로 마땅히 낡은 집을 버리고 떠나 맑고 새 거처를 찾아 편안함을 얻어야 한다. 육신이 죽고 정신이 떠나가는 것 또한 이와 똑같은 이치이다.

만일 삶에 질척하게 매달리고 죽음을 미워하여 대자연의 위대한 순환과 변화를 거스르려 든다면 정신과 인식이 뒤바뀌어 산란해지고 참된 삶의 대업을 잃게 된다. 이처럼 흐리멍덩한 마음을 품고 장차 다음 생의 탯줄을 잡고 기운을 받을 때는 맑고 빼어난 기운을 감응받지 못하고 더럽고 천박한 모욕만 겪게 된다. 세상의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하우(下愚)의 무리들이 생겨나는 근원이 실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만일 태어남에 유독 기뻐 날뛰지 않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싫어하지 않는다면, 첫째는 삶과 죽음의 깊은 이치가 평등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깨끗한 마음으로 다음 생의 대업을 온전하게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온갖 어지러운 경계를 몹시 탐하고 사랑한다면 그 사랑 하나가 곧바로 한 가지 큰 마음의 질병이 된다. 우리 몸의 한 팔다리만 아파도 온몸이 불편하여 견디지 못하는데 하물며 한 마음에 만 가지 애착의 병이 들어차 있으면서 몸뚱이가 영원히 살아가기를 바란들 어찌 도달할 수 있겠는가!

무릇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은 모두 망상(妄)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쌓인 망상을 씻어내지 못하면 도를 깨닫는 데 큰 장애가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온갖 헛된 욕망을 내려놓고 무소유에 머물며 서서히 마음의 근본을 맑고 깨끗하게 가라앉힌 뒤, 옛날에 유독 탐내고 사랑하던 대상을 돌이켜 관찰해보면 저절로 누추하고 싫증이 나며 하찮게 여겨지게 된다.

세상의 어지러운 유혹과 똑같이 합일된 집착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한 평생 살아가도 세상의 해로움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을 멀리 여의려는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관찰할 때 비로소 선악과 옳고 그름의 경계를 뚜렷이 꿰뚫어 볼 수 있다. 마치 술에서 깨어난 맑은 사람만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취객의 추태와 악함을 분명히 볼 수 있고, 제 스스로 취해 있을 때는 아무런 허물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경전에서 “나는 본래 세속을 버리고 사사로운 인간 세상을 멀리 도망쳤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눈과 귀의 소리와 빛깔은 그대에게 허물과 재앙을 남겨두는 덫이요, 코와 입이 유독 즐겨 찾는 향기와 맛은 생명을 갉아먹는 원수(怨)”라고 하였다. 노자(老君)는 세속에 싫증을 느껴 세상을 등지고 홀로 독야청청 참된 세상을 관찰하였으니, 세속의 향기와 맛이란 원수와 같다. 탐욕과 욕망의 시궁창 속에 빠져 노니는 무리들이 어찌 저 썩은 생선 냄새 진동하는 시골 어시장(鮑肆)의 악취를 스스로 알 수 있겠는가!

제6단계: 태정 (泰定六 – 지극한 안정)

대저 정(定)이란 세속을 벗어나는 지극한 경지이자 도(道)에 도달하는 최초의 근본 기틀이며, 고요함을 훈련하여 성공을 거두고 안정을 온전히 유지하는 완전한 대업이다.

형체는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음은 불 꺼진 재와 같아 아무런 바라는 바도 없고 구하는 바도 없는 고요하고 쓸쓸한 담박함의 극치이다. 마음에 억지로 안정을 구하려는 인위적인 의도가 전혀 없으면서도 어느 곳이나 안정되지 않음이 없으므로 이를 일컬어 ‘태정(泰定, 지극하고 태평한 안정)’이라 한다.

《장자》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우주가 태평하게 안정된 자는 신령스러운 하늘의 빛(天光)이 발현한다”고 하였다. 우주(宇)는 사람의 마음(心)이요, 하늘의 빛(天光)은 안정에서 흘러나오는 참된 지혜(慧)이다. 마음은 도(道)를 담아내는 그릇(器宇)이니 비움과 고요함이 극치에 도달하면 도가 스스로 거처하게 되고 밝은 지혜가 저절로 싹튼다. 지혜는 마음의 본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이를 ‘하늘의 빛’이라 부른다.

다만 세상의 탐욕과 집착으로 마음이 더럽혀지고 어지러워져 마침내 흐려지고 길을 잃었을 뿐이다. 마음을 씻어내어 맑게 하고 부드럽고 곧게 길들여 본래의 순수한 정숙함으로 되돌려 놓으면, 우리 마음에 내재한 본래의 참된 정신(神識)이 서서히 스스로 밝아지니 어찌 지금 새삼스럽게 딴 지혜가 생겨났다고 말하겠는가!

참된 지혜가 생겨난 뒤에는 소중히 가슴에 품고 잘 보존해야 하며, 잔재주와 얕은 지식을 뽐내며 도리어 마음에 도달한 안정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참된 지혜를 생겨나게 하기는 쉬워도 지혜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 쓰지 않기(慧而不用)란 실로 어려운 법이다.

예로부터 제 잘난 육체와 형상을 잊어버리는 자(忘形)는 많았으나 제 헛된 명예와 이름을 잊어버리는 자(忘名)는 심히 드물었다. 지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부로 세상에 자랑하여 쓰지 않는 것, 이것이 진실로 명예를 잊어버리는 드높은 경지이다. 천하에 이에 도달하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극히 어렵다고 한 것이다.

지위가 존귀해도 잘난 체 오만하지 않고, 재물이 풍부해도 사치 부리지 않는 자는 세속의 과실과 번뇌가 없으므로 능히 부귀를 오랫동안 보존한다. 마음의 안정을 얻어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고, 밝은 지혜를 지녔으되 함부로 밖으로 휘두르며 쓰지 않는 자는 수도인의 허물이 없으므로 마침내 깊고 참된 영원한 도(真常)를 온전히 증명한다.

《장자》에서 이르기를 “도(道)를 머리로 알기는 쉬우나 도에 대해 섣불리 함구하고 말하지 않기는 지극히 어렵다. 깨닫고도 말하지 않는 자는 하늘의 세계(天)로 나아가는 사람이요, 깨달았다고 세상에 떠들어대며 자랑하는 자는 어지러운 인간 세상(人)으로 떨어지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옛 성현들은 오직 하늘의 자연스러움을 따랐을 뿐 비좁은 인간의 작위를 쫓지 않았다. 머리로 지혜롭게 도를 잘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되게 도를 얻은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얕은 지혜를 얻어 부리는 눈앞의 쓸모와 편리함은 잘 알면서도, 온전하게 도를 얻어 누리는 거대한 생명의 유익과 가치는 잘 알지 못한다.

얕은 지혜로 우주의 지극한 이치를 밝힌답시고 청산유수 같은 말재주와 웅변을 토하며 세상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제 마음에 욕심을 내어 세상일에 사사건건 관여하며 제 잘난 지식을 한없이 넓혀가면서 스스로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쓸쓸하다”고 허풍을 치니, 제 어찌 고요함이라는 것이 그저 조용히 앉아 세상을 구경하며 기다리는 비좁은 은둔 놀음인 줄만 알겠는가! 이러한 떠벌림은 일절 참된 태정의 안정과 거리가 멀다.

그 재주와 영민함이 비록 대중보다 우뚝 솟아 뛰어날지라도 도에는 눈곱만큼도 가깝지 않다. 본래 숲속의 거대한 사슴(鹿)을 사냥하려 떠나놓고 겨우 토끼 한 마리 잡아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꼴이다. 얻은 바가 이처럼 쥐꼬리만 하고 알량한 것은 진실로 제 도량과 마음그릇(局)이 좁아터졌기 때문이다.

《장자》에서 이르기를 “옛날에 훌륭하게 도를 다스리던 학자들은 오직 온화하고 한가로운 고요함(恬)으로써 제 지혜(智)를 조용히 길렀다. 고요함 속에서 참된 지혜가 생겨났으되 얕은 꾀와 잔머리로 제 지혜를 함부로 부리지 않았으니, 이를 일컬어 ‘지혜로써 고요함의 성품을 맑게 기른다(以智養恬)’고 한다. 지혜와 고요함이 서로를 부드럽게 기르고 보완해줄 때 대자연의 조화로운 이치와 참된 성품이 비로소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온화한 고요함(恬)과 밝은 지혜(智)는 곧 고요한 안정(定)과 밝은 지혜(慧)요, 조화로운 이치는 신령스러운 도와 덕이다. 지혜를 품고 있으면서 함부로 자랑하여 쓰지 않고 묵묵히 고요함을 지키며 살아가는 수행을 오랫동안 쌓으면 자연히 거룩한 도와 덕을 온전히 성취한다.

그러나 마음에 찾아드는 안정을 깊이 고찰해보면 인위적으로 억지로 애써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이익의 배후에 도사린 거대한 해로움을 뚜렷이 관찰하고, 헛된 번뇌의 화를 두려워하여 조바심 내던 마음을 스스로 가라앉히며, 얽매임을 과감히 버리고 마음의 때를 씻어내어 맑게 하기를 매일 반복하여 마음을 길들이면 온갖 번뇌가 일시에 다 가라앉아 마침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도와 하나가 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마른하늘에 벼락이 쳐서 거대한 산이 무너져 내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서슬 퍼런 칼날이 코앞에서 어지럽게 춤을 춰도 마음에 털끝만 한 두려움도 없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는 벽 틈새로 흘러가는 차가운 바람처럼 하찮게 바라보고 삶과 죽음의 문제는 제 몸에 난 종기가 터져 고름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므로 “마음의 뜻과 뜻을 오직 하나로 모아 흩어지지 않게 하면 정신이 굳건히 응집되어 맑은 신령과 하나가 된다”고 한 것이니 마음의 텅 비어 있고 신비로운 조화는 실로 머리로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신비다.

마음이라는 존재는 본체를 관찰해보면 형체가 없어 존재하지 않는 듯하지만, 인연을 따라 신비롭게 작용할 때는 우주 만물에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없는 듯하면서도 엄연히 존재한다. 굳이 채찍질해 달리지 않아도 번개처럼 신속하게 움직이고 부르지 않아도 부르는 즉시 마음에 도달한다.

마음에 한 번 노여움을 품으면 굳건한 돌벼락도 꿰뚫고 원망의 슬픔을 품으면 붉게 타오르는 한여름 복날에도 서리가 내리게 만든다. 마음에 악독함을 방종하게 부리면 아홉 갈래 깊은 지옥(九幽)이 바로 눈앞에 가깝고 선량함을 차곡차곡 쌓아가면 맑고 깨끗한 천상의 삼청궁(三清)이 어찌 멀겠는가!

홀연히 오고 홀연히 가니 동요와 고요함의 이름으로 규정할 수 없고, 때로는 옳고 때로는 그름을 점치는 거북 등껍질이나 시초 점대로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이 변화무쌍한 사나운 마음을 길들여 훈련하는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 어찌 저 야생의 사나운 사슴과 거친 말을 훈련하는 고통에 비교하겠는가!

위대하신 태상노군께서 위대한 선량함의 조화로써 만백성을 제도하고자 신령스러운 영대에 높이 올라 깊고 미묘한 진리를 연설하시니, 소승과 대승의 비좁은 인과율의 굴레를 훌쩍 초월하여 만물이 저마다 지닌 스스로 그러한 대자연의 본래 성품을 널리 깨우쳐 주셨다.

점진적인 점수의 방법으로써 날마다 인위적인 작위를 덜어내고 덜어내며(日損有爲), 일시에 확 깨닫는 돈오의 비결로써 배움이 아예 필요 없는 텅 빈 무학의 고향으로 고스란히 되돌려 놓으셨다.

수행을 비유하자면 활시위를 힘껏 당기고 곧은 화살을 깎아 과녁을 겨누는 것과 같고, 수행의 비법은 예리한 모서리를 둥글게 꺾고 얽히고설킨 엉킨 실타래를 부드럽게 풀어내는 것과 같다. 이 핵심을 늘 상도로 삼아 쉼 없이 닦아 성품으로 길들이고, 귀와 눈의 얕은 잔꾀를 내쫓고 육체의 고착을 잊어버리는 좌망을 실천하여 아득히 앉아 제 자신을 잊어버리면 고요함 속에서도 마음에 털끝만큼도 동요가 없이 미세한 우주의 조화가 마음의 거울 속에 뚜렷이 비친다.

길을 잘못 들어 사특한 딴 길을 걷는 자들은 백날 닦아도 참된 깨달음의 원만한 종지를 이해할 날이 요원하지만, 오직 이 참된 대도를 유유자적 걷는 자들은 우주의 오묘한 실상을 관찰할 날이 머지않아 뚜렷이 기대된다. 적은 노력을 들여 거대한 위업을 온전히 얻는 수행의 핵심 비결이니 실로 참되고 오묘하도다!

제7단계: 득도 (得道七 – 도를 얻음)

대저 도라는 것은 신비롭고 기이한 영물로서 영묘하여 스스로 참된 성품이 존재하며 텅 비어 형상이 없다. 다가가 마중하려 해도 앞뒤를 헤아릴 수 없고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도대체 왜 그렇게 스스로 그러한지 영문을 알 수 없으나 저절로 그렇게 대자연으로 존재하여 온 세상을 관통하여 살려냄에 아무런 막힘과 다함이 없는 거대한 에너지를 일컬어 ‘도’라 부른다.

지극히 거룩한 성현들은 옛날에 이를 스스로 증명하여 얻었고 오묘한 법은 끊임없이 전해 내려와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으니 이름을 따라 이치를 깊이 탐구해보면 엄연히 참된 실체가 존재한다.

상등의 근기를 지닌 훌륭한 학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온전히 믿어 제 아집을 극복하고 부지런히 실천하며, 마음을 텅 비우고 신령스러운 골짜기의 신을 기르니 오직 신성한 대도만이 그 빈 마음에 스스로 모여든다.

도는 거대하고 깊은 에너지를 품고 있어 수행하는 자의 육체와 정신(形神)을 서서히 근본적으로 개조하고 변화시켜 준다. 육체가 마침내 도의 거대한 조화에 순응하여 통하게 되고 정신과 완벽하게 하나로 합일되니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일컬어 ‘신인(神人)’이라 부른다.

신령스러운 성품은 텅 비어 우주와 조화롭게 융합되어 있으므로 그 본체는 영원히 소멸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육체 자체가 도와 똑같이 동기화되어 변화하므로 태어나고 죽는 생사의 물리적 굴레가 아예 없다.

모습을 감추어 은둔할 때는 육체 자체가 신비로운 정신과 똑같이 무형으로 변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정신 자체가 우주의 맑은 에너지와 똑같이 눈에 보이게 화현하므로, 물과 불속을 밟고 다녀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타오르는 태양과 밝은 달빛 아래 서 있어도 땅에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는다. 존재하고 사라지는 생사를 오직 제 마음대로 결정하고 우주의 안팎을 아무런 걸림돌 없이 유유히 나들며, 본래 추하고 탁한 찌꺼기 덩어리에 불과하던 흙 육신마저도 지극히 텅 비고 신령스러운 소립자로 변화되는데 하물며 그 마음에 내재한 본래의 신비로운 지혜야 날이 갈수록 얼마나 더 깊고 멀어지겠는가!

《생신경》에서 이르기를 “육체와 정신이 온전히 결합하여 하나가 되면 그것이 곧 참된 진짜 육신이다”라고 하였다. 또 《서승경》에서도 이르기를 “형체와 정신이 조화롭게 합일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오래 존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참된 텅 빈 무의 세계인 허무의 도는 닦아 들어가는 공력의 깊고 얕음에 차이가 존재한다. 공력이 지극히 깊은 자는 도의 에너지가 능히 육체와 마음 양면을 모두 완벽하게 변화시켜 주지만, 공력이 얕은 자는 오직 마음에만 도의 효험이 도달한다.

도의 조화가 육체까지 미쳐 개조된 자는 마침내 ‘신인’의 지고한 반열에 오르지만, 오직 마음에만 미친 자는 비록 세상의 실상을 환히 아는 지혜와 깨달음은 얻었을망정 제 흙 육신의 쇠락과 죽음은 끝내 피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얕은 지혜는 마음의 일시적인 밖의 쓰임새에 불과하니, 쓰임새가 지나치게 많으면 마음의 진짜 본성이 고달파지기 때문이다. 명상 수행을 하다가 초기에 작은 지혜를 쥐꼬리만큼 얻어놓고 몹시 기뻐 날뛰며 세상 사람들과 입씨름을 벌이고 말싸움을 즐기며 논쟁을 일삼으면, 마음에 축적된 신령한 진짜 기운이 밖으로 탈탈 털려 누수되어 사라진다. 그리하여 제 육신을 윤택하게 적셔 빛나게 해 줄 신령한 생명 에너지가 고갈되므로 마침내 젊은 나이에 일찍 죽게 되니, 도를 원만하게 성취하기란 이처럼 지극히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법이다. 경전에서 성현이 흙 육신을 매미 허물 벗듯 훌쩍 던져버리고 떠난다는 ‘시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혜가 깊고 드높은 대인은 안정을 통해 얻은 밝은 지혜의 빛을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고 마음 깊숙이 감추어 함부로 쓰지 않으며, 오직 생명하고 영혼의 완벽한 성취를 묵묵히 도모할 뿐이다.

맑은 정신을 한곳에 단단히 응집시키고 숭고한 기운을 소중히 보존하여, 도를 배움에 아무런 사사로운 욕심이나 잘났다는 마음이 없이 텅 비워 두면 정신이 마침내 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니 이를 비로소 ‘득도’라 한다. 경전에서 “도와 완전히 동기화되어 하나가 된 자는 도 또한 그 사람을 온전히 얻어 품어준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옛날부터 사람들이 이 도를 유독 귀하게 여겼던 까닭이 무엇인가? 애써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얻게 되고 지은 업장과 죄가 있더라도 깨끗이 면해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산속에 단단하고 진귀한 보옥이 들어차 있으면 주변의 풀과 나무조차 가뭄에도 시들거나 마르지 않는다. 사람이 가슴속에 거룩한 대도를 고스란히 품고 있으면 제 뼈마디와 육신마저도 덕분에 썩지 않고 영원히 견고하게 보존된다.

참된 향훈에 젖어 살기를 매일 거듭하여 번뇌로 가득 차던 육체적 질그릇의 소질을 개조하여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divine 신령과 똑같이 변화시키고, 거친 물리적 몸뚱이를 연마하여 지극히 투명하고 미세한 원초적 입자로 정화해 들어가 마침내 도와 그윽하게 합일되는 것이다.

합일되고 나면 제 한 몸을 흩어 온 우주의 만 가지 법칙으로 자유자재하게 작용하게 만들고, 온 우주의 만 가지 법칙을 조화롭게 융합하여 제 한 몸속에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한다.

지혜의 비춤은 끝닿는 데 없이 우주 끝까지 밝게 우러나오고 육체의 한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끝닿는 경계가 없으며,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형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텅 빈 공간을 제 마음대로 주재하여 마음껏 활용하고, 온 우주의 대자연과 삼라만상의 창조와 변화를 품어 거대한 영적 성공을 원만하게 달성한다.

온 우주에 인연을 따라 무한하게 감응하여 화현해 주시니 이는 오직 스스로 그러한 거룩한 도와 덕의 조화일 뿐이다. 《서승경》에서 이르기를 “하늘 대자연과 온전히 한마음이 되어 인위적인 앎과 잔머리가 없고, 위대한 도와 온전히 한 몸이 되어 비좁은 물리적 육체의 구속이 없어진 뒤에야 비로소 하늘의 대도가 드높이 융성하리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수행의 극치와 최고 정점을 완전히 증명한 도인의 경지이다.

또 이르기를 “신령한 참 정신이 육신의 집을 함부로 탈출하지 않고 굳건히 머물러 도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존재한다”고 하였다. 대저 육신이 대도와 완벽하게 합일되면 우주 시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없고, 마음이 대도와 완벽하게 하나가 되면 세상 온갖 법칙과 이치 중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귀가 대도와 하나가 되면 우주 삼라만상의 온갖 고요하고 미세한 소리 중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없고, 눈이 대도와 합일되면 우주 삼라만상의 온갖 무형의 색상 중에 보이지 않는 빛이 없다. 우리 몸의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한계 없이 사방으로 활짝 열려 온 우주를 관통하여 명명백백하게 아는 초월적인 상태가 진실로 이 드높은 수행 덕분에 원만히 달성된다.

근래의 얕고 평범한 무리들은 식견이 좁아 안목이 멀리 미치지 못하므로 오직 육체를 지레 버리고 떠나는 시해나 죽은 뒤의 사후 영혼 구원 타령이나 들을 줄 알았지, 살아서 제 살아 있는 육신 그대로 대도의 신령한 완성에 도달하는 즉신성도의 기막히고 오묘한 실상은 꿈에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제 배움이 비좁은 허물은 뉘우칠 줄 모르고 도리어 참된 성현의 수행을 손가락질하며 남들의 그릇된 비방을 앵무새처럼 흉내 낸다.

이는 마치 한여름 잠시 살다 죽는 매미나 하루살이가 겨울날의 꽁꽁 얼어붙는 눈보라와 얼음의 실존을 도저히 믿지 못하고, 초간장 항아리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살아가는 하루살이 벌레가 항아리 밖 하늘과 땅의 거대한 광활함을 아예 알 턱이 없는 것과 같다. 그 미련함과 어리석음이 실로 대책이 없고 가르쳐 줄 도리조차 없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도다!

좌망추익 (坐忘樞翼 – 앉아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명상의 핵심 추축)

도가 깊은 도인이 되어 참됨을 이루고자 갈망한다면 마땅히 최우선으로 사특하고 편벽된 그릇된 행실부터 깨끗이 없애야 한다. 세상일과의 복잡한 인연을 완전히 단절하여 외부의 자극이 마음에 털끝만큼도 끼어들지 못하게 만든 뒤, 몸을 단정히 가라앉히고 앉아 내면을 조용히 관찰하며 마음속 깊은 곳의 참된 각성을 깨운다.

명상을 하다가 마음속에 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을 자각하는 즉시 번개처럼 없애야 한다. 생각이 일어나는 족족 단속하고 다스려 마음이 고요하고 맑은 고요함을 유지하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다음으로, 비록 특정한 사물에 대한 탐욕이나 집착이 아닐지라도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다니며 방황하는 온갖 잡념과 흩어진 어지러운 공상들 또한 샅샅이 다 멸하여 없애버려야 한다. 낮이나 밤이나 쉼 없이 부지런히 닦아 단 한 순간도 멈추거나 게으름을 부려선 안 된다.

오직 동요하는 사나운 생각의 마음만 없애는 것이지, 세상의 이치를 거울처럼 뚜렷하게 비추어 아는 신비로운 비춤의 마음을 멸해선 안 된다. 오직 물리적 대상에 끄달리는 구체적인 집착의 마음만 어둡게 가라앉히는 것이지, 우주를 품어 안는 텅 빈 마음을 어둡게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한 가지 유한한 사물에도 집착하거나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늘 상도에 여여하게 머무는 것, 이 명상법이야말로 지극히 신비롭고 깊어 얻어 누리는 공덕과 이익이 실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본래 전생부터 도의 숭고한 인연이 두텁고 도를 믿는 마음이 털끝만큼도 흔들림 없이 한결같은 뛰어난 자가 아니라면 이 가르침을 듣고 쉽게 믿어 중요하게 여길 수 없다. 비록 입으로 책의 본문을 줄줄 외울 줄 알지라도 수행에 들어가서는 진짜 안정과 가짜 안정의 차이를 똑똑히 가려내야 한다. 왜 그러한가?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와 화려한 빛깔은 늘 마음을 어둡게 가리고, 사특하고 달콤한 아첨은 귀를 속여 흔들며, 나와 남을 갈라 치는 아집과 고집은 이미 사람의 타고난 고약한 성품이 되어 제 스스로 옳다고 우기는 마음의 병이 뼛속 깊이 사무쳐 있으니, 마음이 도덕과 멀리 소외되어 이 가르침의 깊은 이치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을 다잡아 지극한 대도에 진정으로 귀의하고자 깊은 신앙과 앙모의 뜻을 냈다면 마땅히 명상의 삼계를 우선 받아들여야 한다. Precept에 의지해 한결같이 닦아 시작할 때의 초심을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하면 마침내 참된 도를 완전히 얻는다.

그 세 가지 규칙이란, 첫째는 인연을 지극히 단순화하는 것이요, 둘째는 헛된 욕심을 아예 내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번뇌를 가라앉히고 마음을 극도로 고요하게 굳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Precept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용맹정진하여 쉼 없이 실천하는 자는, 굳이 도를 억지로 애써 구하려 들지 않아도 도가 스스로 다가와 그 텅 빈 마음에 영원히 머물게 된다. 경전에서 “사람이 마음을 텅 비우고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무위에 살아가면 도를 구하려 애쓰지 않아도 도가 스스로 귀의한다”고 한 것이 실로 이것을 말함이다. 이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이처럼 지극히 간단하고 요긴한 수도의 법칙이야말로 실로 가장 믿음직하고 온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보물이다!


📖 주요 한자 · 고사성어 풀이

  • 坐忘 (좌망) — 몸과 마음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집과 인위적 총명을 다 잊어버리고 천지 대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무위(無爲)의 영적 명상 상태.
  • 恬簡 (념간/염간) —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恬)와 소박하고 단순하며 얽매임이 없는 검박한 일상생활(簡)을 아우르는 지고한 수도 생활의 미덕.
  • 虛無 (허무) — 아무것도 없는 비어 있음이 아니라, 일체의 사사로운 고착이나 집착이 없어 텅 비어 있으되 온 우주의 무한한 생명과 영묘한 조화가 나오는 도의 본질.
  • 泰定 (태정) — 마음에 억지로 명상의 고요함을 구하거나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없이도 어느 곳에서나 늘 흔들림 없이 고요하고 깊게 안정된 우주 samadhi 경지.
  • 虛心 (허심) — 마음속에 어떤 선입견이나 아집, 사사로운 탐욕을 일절 담지 않고 온전히 비워 두어 대도가 마음속에 스스로 와서 편안히 안주하도록 하는 무위의 상태.
  • 心有五時 (심유오시) — 명상이 깊어짐에 따라 마음의 상태가 진화하는 5단계 과정. 번잡한 동요에서부터 외부 자극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도와 완벽히 부합하는 부동의 상태까지 순차적으로 전개됨.
  • 身有七候 (신유칠후) — 도가 몸에 조화롭게 스며들면서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와 진화의 7가지 징후. 오랜 고질병이 사라지고 몸과 기운이 가벼워지며 장수하여 마침내 지극한 지인의 형신합일 경지에 도달함.
  • 隳肢體黜聰明 (휴지체출총명) — 장자에서 유래한 좌망의 핵심 비결로서, 물리적 육체의 모든 감각과 속박을 잊고(휴지체) 세속의 인위적인 얕은 꾀와 잔머리 지혜를 완전히 내쫓아(출총명) 대도에 이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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